Violator
향민
유진혜준 앤솔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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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긴 개뿔.
혜준이 굳게 닫힌 유진의 사무실 문을 뚫어질 듯 노려보며 속으로 욕지기를 읊조렸다. 하여간에 사람 귀찮게 하는 데에는 비상하게 도가 튼 인간이었다.
혜준과의 짤막한 통화 이후 유진은 그대로 잠수를 타버렸다. 그가 통화를 끊고 나서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는 몇 달 후에 찾아온 국정원 요원이 넌지시, "이혜준 씨, 유진 한 자수한 거 알고 계셨죠?"하고 떠봤을 때에야 알았다. 처음 기소되었을 땐 '기재부 공무원 조 모 씨'와 'H 씨'로 뉴스에까지 떴지만, 워낙 복잡한 사건이라 관심은 금세 수그러들었고 판결 내용은 국가법령정보센터 사이트를 뒤져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혜준은 불 꺼진 사무실에 혼자 남아 모니터 너머로 판례가 된 그의 소식을 읽으며 볼을 긁적였다. '피고인'이라는 단어가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 지독하게도 대법원까지 갔다는 게 참으로 그 다운 짓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의 면전에 대고 '지독하다'라고 말하면, '항소심은 시민의 권리예요.'라고 너스레를 떨며 항변하겠지만, 어쨌든 그는 지금 혜준의 곁에 없었다.
집행유예 기간인 1년간은 죗값을 치르는 중이니 자중을 하나 싶었고, 2년째는 혜준도 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주말도 반납해가며 일해야 했던 시기가 겨우 지나고, 야근하는 날이 안 하는 날보다 약간 적을 정도로만 여유로워졌을 즘에는, 혜준은 빈곤한 편인 자신의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온갖 가정을 세웠다가 무너뜨렸다가 또다시 세우며 속 시끄러운 세월을 보냈다.
찾아오겠다던 말에 기다리겠다는 대답을 안 해서인지, 혹시 어디 심한 병이라도 걸렸는지, 아님 그놈의 남대문 갈치조림 혼자 처먹다 가시가 걸려 질식이라도 했는지, 혹시 뉴욕 뒷골목 어드메에서 옛날 옛적 등 처먹고 원한 샀던 인간한테 총 맞아 죽기라도 했는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혜준은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유진의 생생한 모습을 떠올렸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머릿속에 진득하게 달라붙은 그 장면을 떨쳐보려 애써야 했다.
결국 혜준은 자신의 기준에 가장 현실적인 답을 내리기로 했다. 한유진에게는 그새 다른 사람이 생겼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점심시간에 식사를 마친 혜준은 쉼 없이 떠들어대는 수종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해진 명함 하나를 꺼냈다. 마리가 '진짜 괜찮은 애니까 한번 만나보기라도 해보라'면서 쥐여준 기자 후배의 연락처였다. 손바닥만 한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문자창을 띄우고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안녕하세요, 진마리 기자 사촌 이혜준입니다.'
간결한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본 다음 머뭇거리다가 전송 버튼을 꾹 눌렀다. 그게 무슨 신호라도 됐는지, 여태 배경소음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던 수종의 말이 갑자기 또박또박 귀에 박혀 들어왔다.
"유진 한 이거 바하마에 또 기어들어 갔나 보네, 참나. 이 사무관, 너 이거 알았어?"
혜준은 긴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차라리 부고가 나았을지도 모른다.
***
수종의 말대로 3년간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유진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또다시 바하마를 위해 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인은행 대주주고, 국내 외환시장 보호 정책에 꼬투리를 잡아대며, 바하마의 손익에 영향을 끼칠만한 정보를 알고 있는 재미교포 컨설턴트.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날 오후 미팅 때, 정인은행 은행장 입에서 '사실 저희 주주 님이 새로 조건을 말씀하신 게 있어서......'로 시작하는 말이 나온 것까지야 다소 심기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납득 가능한 조건이었기에 이해했다. 혜준의 팀이 작성한 경제 법안의 입법 추진에 도움을 주기로 했던 국회의원과의 저녁식사에서 '내가 아는 꽤 괜찮은 미국파 컨설턴트가 그러는데 그 정책에 허점이 좀 있다던데......' 했을 때는 겨우 완성한 줄 알았던 법안의 수정본을 또 수정해야 한다는 사실에 진이 약간 빠졌을 뿐이다.
겨우 집에 도착하자마자 사무실에 남아있던 후배가 전화로 '이 사무관님 퇴근하셨어요? 죄송한데 지금 바하마 뉴욕지사에서 뜬금없이 영사관에 항의를......'이라고 음울하게 운을 뗐을 때는 울컥 치밀어 오른 짜증도 심호흡 몇 번에 삼켜낼 수 있었다. 혜준은 이제 그 정도로는 크게 동요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일에 충분히 능숙해진 참이었다.
결국 오밤중에 다시 출근한 혜준은 뉴욕의 총영사관과 통화로 다소 언성이 높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새벽까지 일을 처리했다. 오전에 책상에 엎드려 잠깐 눈을 붙였다가도 불편한 자세 때문에 금방 깨버린 혜준은 '그래도 오늘 정시 퇴근만 할 수 있다면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은 하루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핸드폰 잠금을 해제하고, '이혜준 씨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먼저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 되시면 주말에 같이 식사하실래요? 답장이 늦어서 죄송해요, 마리 선배가 장난치는 줄 알았거든요.'라는 문자를 마주하고서 혜준은 결국 수종의 항의를 못 들은 체 하며 그의 재킷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흡연구역으로 향했다. 초조함을 가라앉히기 위해 두 달간 참은 담배를 연달아 세 개비나 뻑뻑 피워대며 고민한 결과, 혜준은 식사 제안에 답장을 하는 대신 마리에게 문자를 보냈다.
'유진 한 지금 대체 어디 처박혀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봐 줄 수 있어?'
그리고 혜준의 참을성을 시험하기라도 하듯이,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들어버린 이름은 또 '유진 한'이었다.
"대체 유진 한이 누굽니까?"
어제 혜준을 호출해 같이 사무실에서 밤을 새운 후배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수종에게 묻고 있었다.
"원래 그, 바하마코리아 지사장이었는데, 아유 여튼 역사가 좀 길어. 그동안 잠잠하더니 어제부터 아주 일을 뻥뻥 터뜨리시네. 어이구."
혜준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며 멀찍이서 던진 담뱃갑을 가볍게 받아낸 수종이 툴툴거렸다.
"아니 왜 이렇게 가벼워졌어? 끊는다던 사람이 대체 얼마나 피운 거야. 아이, 요즘 담뱃값 비싼 거 다 알면서."
혜준이 헛기침을 해서 잠긴 목을 풀고 자리에 털썩 앉으며 대꾸했다.
"쪼잔하게 굴지 마시고요, 또 무슨 일 있어요?"
담배 개수를 세면서 입이 댓 발 나온 수종 대신 후배가 주눅 든 목소리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바, 방금 정인은행장이 국장님한테 무슨 문건을 공유해달라고 하면서 그게 없으면 자기들도 협조 못한다고 했대요. 이번 일이랑 관련도 없는 정보인데 대체 왜 그러나 싶어서 여쭤보니까, 박 사무관님이 그거 분명 유진 한이 시킨 걸 거라고......"
"야 빼박이지. 솔직히 그걸 어떻게 믿고 공유를 해주냐. 또 바하마에 홀랑 가져다 바칠게 분명한데."
"그건 국장님이 알아서 판단하시겠죠."
"아주 나 노이로제 걸리겠어, 이 사무관. 담뱃값 안 받을 테니까 유진한 좀 제발 어떻게 좀 해봐.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까 피가 마른다, 피가 말라."
"제가 뭘 어떻게 해요."
"얼굴이라도 비춰서 좀 달래보든지."
"한유진 씨가 애도 아니고 뭘 어떻게 달랩니까, 박 사무관님. 그리고 한유진 씨가 애면, 제가 뭐 뽀로로라도 돼요? 본다고 달래지게?"
안 그래도 잔뜩 날이 서있던 혜준이 수종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모니터 속에서 깜빡거리는 마우스 커서를 죽일 듯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머쓱해진 수종이 슬쩍 눈치를 보며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던졌다.
"그 와중에 뽀통령이라니, 이 사무관 은근 야망이 크네. 대통령 자리도 노리고."
혜준이 말없이 괜히 애꿎은 마우스만 책상에 퍽퍽 내리치자 수종이 입맛을 쩝 다시곤 손바닥을 비볐다. 혜준의 핸드폰이 또 한 번 짧게 울렸다. 마리의 답장이었다.
"그래도 넓은 아량으로 한 번만 좀 시도라도 해봐주라, 그래도 유진 한 그 양반이랑 너랑 연이 깊긴 하잖, 으아아! 아냐 아냐, 이 사무관 미안해, 미안해. 진정해, 취소할게. 둘이 아~무 사이도 아닌 거 내가 제일 잘 알지."
문자를 확인한 혜준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자 기세에 놀란 수종이 손사래를 치며 사과를 해댔다. 혜준은 아무 말 없이 멀티탭 전원을 내려서 강제로 컴퓨터 전원을 끄고는 태풍 같은 기세로 짐을 싸더니 의자에 걸려 있던 외투를 거칠게 집어 들었다. 외투 소매에 팔을 끼워 넣던 혜준이 멈칫하고 수종을, 정확히는 수종이 들고 있는 담뱃갑을 쳐다봤다.
"왜.... 왜 그래 이 사무관, 무섭게......"
혜준은 혀를 한번 쯧 차더니 수종의 손에서 담뱃갑을 거칠게 낚아채곤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아니 그, 그냥 달라고 하면 줄 텐데, 내가......"
얼굴에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후배가 토끼 눈을 뜨고 굳은 채로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사무실 동료들 모두가 쥐 죽은 듯 혜준의 눈치만 살폈다. 늘 적막하고 고요한 호수 같던 혜준의 검은 눈이 맹렬하게 불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깥의 소란을 감지한 국장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국장실 문을 살짝 열고 목만 빼꼼 내밀었다. 눈을 대록대록 굴리다가 사무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쪼끄만 등을 발견한 국장이 근처에 앉아있던 과장에게 입모양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과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그새 겉옷을 챙겨 입고 백팩까지 야무지게 맨 동그란 뒤통수는 맹렬한 발걸음으로 걸어 나가는 중이었다. 용기를 낸 국장이 넋 나간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2시인데 짐 싸 들고 어디 가?"
잠깐 멈칫한 혜준이 국장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주먹으로 자동문 버튼을 퍽 소리가 나게 때리듯 누르며 대답했다.
"애 보러요."
대체 언제부터 애가 있었냐는 국장의 벙찐 목소리와 저렇게까지 화를 낼 일이냐며 억울해 하는 수종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체 하고 잰걸음으로 국금과를 나선 혜준은 씩씩거리며 주차장으로 내려가 자동차에 올랐다. 마리가 보내준 사무실 주소를 입력하기 위해 내비게이터에 'ㅂ'을 치자마자, 검색 기록에 '바하마 코리아'가 반짝 떠올랐다. 어쩐지 분한 마음이 든 혜준이 주먹으로 핸들을 후려쳤다. 내 잘못도 아닌데 맞은 게 억울하다는 듯 클랙슨이 맹한 소리로 빵! 하고 울렸다.
3년 만이었다.
***
마리가 보내준 유진의 사무실 주소는 바하마 코리아가 아니었다. 심지어 삼성동도, 강남구도 아닌 여의도였다. 마리가 잘못 알았거나, 위장용 가짜 주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의도 한복판의 번쩍번쩍한 빌딩 주차장으로 들어가며 혜준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페이퍼 컴퍼니일까? 아무리 그래도 '버몬트 컨설팅'이라니, 이름을 너무 대충 지어놓은 것 아닌가. 속으로 구시렁대며 주차를 마친 혜준은 1층 로비 프런트 직원의 친절하고 해사한 미소 앞에서 잠시 망설이고 말았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는, 그, 유진 한 사무실 찾아왔는데요."
"한유진 컨설턴트요?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혜준입니다."
"예약하셨나요?"
"아뇨, 그건 아닌데......"
"사전에 예약하지 않으셨으면 방문은 불가능하세요, 죄송합니다."
혜준은 두 눈을 꾹 감았다. 혜준의 손이 명치께를 더듬자 외투 안쪽으로 딱딱하게 공무원증이 만져졌다. 딱, 이번 한 번 만이다.
"사실 기획재정부에서 나왔는데요,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상당히 중요한 일이라서."
혜준이 공무원증을 벗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공무원증의 사진과 혜준의 얼굴을 유심히 번갈아보며 확인한 프런트 직원이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럼 한번 여쭤볼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나저나 컨설턴트라니, 아무리 들어도 사기꾼 같은 직함이다. 어딘가로 전화를 걸던 프런트 직원이 혜준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 보였다. 혜준도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혜준의 손가락이 프런트 데스크를 초조하게 두드렸다.
"17층 바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동안 혜준은 자기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깊은 고민의 수렁에 빠졌다. 무단 조기 퇴근도, 냅다 서울행 고속도로를 탄 것도, 쓸 데 없는 일에 공무원직을 남용한 것도, 여기까지 온 것도 정말 혜준답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물러서는 것이야말로 정말 혜준답지 않은 일이었다.
어느새 '한유진'이라는 명패가 붙은 문 앞에 도착한 혜준의 머릿속에 오래된 목소리가 울렸다.
'찾아갈게요.'
찾아오긴 개뿔.
혜준이 주먹을 꽉 쥔 손을 들어 문을 거칠게 쿵쿵 두드렸다. 노크라기보단 선전포고에 가까운 것이었다. 잠시 후 안쪽에서 희미하게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심호흡을 한 혜준이 문을 벌컥 열었다. 안에서 무엇을 보든 실망하지 않으리.
"이혜준 사무관?"
정말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진짜 이혜준 사무관이었네요?"
"오랜만입니다, 한유진...... 컨설턴트님."
혜준이 말을 마치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미소를 지어 보이려고 했는데, 입꼬리가 잔뜩 굳어서 경련하듯 움찔대는 게 한계였다.
귀신이라도 본 듯 한동안 넋 나간 표정으로 혜준을 멍하니 쳐다보던 유진은 양손으로 얼굴 하관을 감쌌다. 양옆으로 쫙 찢어진 입이야 손바닥으로 가려졌지만, 한계를 모르고 치켜올라가는 광대와 잔뜩 접힌 눈주름은 그대로 보였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나름 침착하게 표정을 갈무리 한 유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심스럽게 책상 맞은편의 의자를 권했다.
"일단 앉으세요. 무슨 일로 왔어요? 이게 얼마 만이죠? 2년? 3년? 와, 별로 안 변하셨네요."
유진의 들뜬 목소리와 씰룩거리는 입꼬리가 정말 반가워서 그러는 건지, 혹은 혜준을 여기까지 불러내려던 속셈이 통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그냥 가증을 부리는 건지 가늠하는 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으로 계속 팔을 의자 쪽으로 뻗은 채 혜준의 얼굴을 관찰하듯 살폈다.
"그러는 그쪽은 왜 그대로예요? 좀 변하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혜준이 의자에 앉지 않고 그대로 선 채로 대꾸했다. 스스로 예상한 것보다 더 낮고 차가운 말투였다.
"나요?"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자를 향해 뻗었던 손을 거둬 손바닥으로 자기 가슴을 짚었다.
"나 엄청 변했어요, 이혜준 찾아가려고. 이혜준 씨가 못 참고 먼저 와버린 거죠."
억울한 목소리에 실소를 참지 못한 혜준이 하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가증인듯 싶었다.
"얼마 만에 보는지 햇수도 헷갈리면서 말은 잘도 하시네요."
"설마 진짜로 나 기다렸어요?"
팔자로 축 처졌던 새카만 눈썹이 기대감으로 다시 위를 향했다. 입꼬리도 마찬가지였다. 혜준이 짜증을 가득 담아 말했다.
"이렇게 갱생 불가한 종자인 줄도 모르고요."
"나 방금 이혜준 사무관이 한 말 무슨 뜻인지 몰라요."
"왜 3년 전이랑 똑같은 짓을 하고 계시냐고요."
말문이 막힌 유진의 눈이 세차게 흔들리다가, 이내 무슨 말인지 알아차렸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래서 서운했어요?"
"아이씨,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요."
"그럼 여기까지 왜 왔어요? 뭐 때문에?"
"정인은행장한테 요구한 문건, 그거 왜 필요한 건지 물어보려고요."
단호한 답변에 유진이 어깨를 힘없이 축 늘어뜨리고는 고개를 돌리며 코를 긁적였다.
임기응변으로 내뱉긴 했지만 사실 그게 서울까지 올 이유는 못됐다. 유진이 기재부가 처리해야 할 일들을 잔뜩 벌여놓은 건 사실이지만, 그중 법적으로 문제가 되거나 그가 이익을 취할만한 것들은 없었다. 국회의원에게 혜준의 팀이 작성한 법안을 재고해보라고 조언한 것은 오히려 펀드 전문가의 시각에서 해외 자본이 법망을 피해 갈 수 있는 허점을 발견하고, 보강할 수 있도록 도와준 셈이기도 했다.
그를 만나러 올 이유보다는 만나서는 안될 이유가 훨씬 많았다. 공무원 된 사람으로서, 이미 기재부 사무관과의 불법적인 청탁을 주고받은 전적이 있는 전과자를 만나러 와선 안됐고, 무슨 속셈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러 처음 가는 곳에 무작정 무기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와서도 안됐다. 정말 이혜준답지 않은 비이성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에 왜 왔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올라오는 차 안에서 내내 연습한 대답 대신 솔직하게 말하자면은, 사실 그냥 궁금했다. '점심 약속'을 수락하든, 거절하든, 혜준에게는 확신이 필요했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면서.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옹색한 변명이었다.
혜준은 귓전에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면서,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유진을 말없이 쳐다봤다. 혜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양복 소매와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대답을 미루던 유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말해도 될지 확신이 없는데. 내 일을 한두 번 망친 게 아니라서, 이혜준 사무관이."
혜준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실 말씀 없으시면 가겠습니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죄송했습니다."
미련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리자 유진이 다급하게 따라나오며 혜준을 저지했다.
"아, 잠깐만요, 이혜준 사무관."
혜준이 고개를 돌려 유진을 쳐다봤다. 유진의 입에서 나온 것은 엉뚱한 제안이었다. 정말이지 변한 거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체스 둘 줄 알아요?"
"예?"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면 아쉽잖아요."
유진이 뒤쪽의 책상 위에 놓인 체스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 아쉬울 거 없는데요."
"우리 엄마 돌아가신 이후로는 같이 체스 둘 상대가 없었거든요."
혜준은 이런 말에 심장이 철렁하는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지만, 그 말에 다리가 무거워진 것도 사실이었다. 혜준이 뭐든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아니면 어머님의 명복부터 빌어야 하는지 고민하며 약간 난처한 얼굴을 하자, 그 표정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유진이 한결 간절한 목소리로 재차 청했다.
"한번 해봐요."
"게임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왜요? 잘 못해서?"
유진의 장난스러운 도발에 난처해하던 혜준의 얼굴이 살짝 굳고 한쪽 눈썹이 위로 휘었다. 유진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말을 이었다.
"게임 싫어하는 사람은 지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닌가? 이기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혜준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고는 볼을 잔뜩 부풀렸다가 푸, 하고 숨을 내뱉었다. 유진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최대한 상냥하지만 너무 부담스럽지는 않은 목소리 톤을 고심하며 말을 골랐다. 앞으로 한 번 만 더.
"괜찮아요. 져도 잃을 거 없잖아요."
결국 으, 하고 앓는 소리와 함께 눈을 크게 굴린 혜준이 매고 있던 백팩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곤 의자에 앉았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해요, 게임."
체크메이트였다. 유진은 혜준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혜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
10cm는 족히 되어 보일 만큼 큼지막한 체스 말이 판에 묵직하게 부딪치는 소리만 방안에 가득 찼다. 누구 취향 아니랄까 봐, 쓸데없이 크고 무거운 체스 말이었다. 얼굴에 달라붙는 유진의 끈질긴 시선이 거슬린 혜준이 다음 수를 짜내느라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내뱉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아뇨, 그냥. 참 신뢰감이 가는 얼굴이에요, 이혜준 씨는. 깨끗하고. 단정하다고 그러나?"
유진의 말을 무시하고 체스판에 눈을 고정한 혜준이 뼈 있는 말로 대꾸했다.
"아 그래요? 그때 C&D랑 컨택한게 유진 씨가 아니라 저였으면 한국의 신용등급이 두 단계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올랐겠네요."
불시에 양심을 찔린 유진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건 옛날 일이잖아요."
"그랬어요? 너무 한결같으시길래 어제 일인 줄 알았거든요."
혜준이 장고 끝에 검은색 비숍을 한 칸 움직였다. 유진은 체스판을 읽지도 않고 곧바로 자신의 흰 폰을 전진시켰다.
"에이 설마, 전화 한 통으로 내가 그걸 다 포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 예상보다 낭만적인 사람이었네, 이혜준."
날선 내용과는 달리 어쩐지 풀 죽은 목소리였다.
"기대 안 했어요. 말 놓지 마시고요."
단호한 내용과는 달리 부드러운 말투였다.
혜준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검은색 속눈썹이 천천히 팔랑거렸다. 체스판을 향해 천천히 뻗은 단정한 손이 검은색 나이트를 옮겼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갈 생각이었는데, 막상 게임을 시작하니 대충 둘 수가 없어졌다.
***
체스판이 듬성듬성 해질 때까지는 예상보다 꽤 긴 시간이 걸렸다. 혜준을 기다리던 유진의 시야에 문득 체스판 옆에 놓인 재떨이가 들어왔다. 혜준이 피우고 버린 꽁초에 담뱃불이 남아있었다. 혜준의 입술 사이에 물렸던 담배를 집어 재떨이 바닥에 가볍게 문질렀다. 내버려 두면 금세 자연히 꺼질 아주 작은 불티를 구태여 비벼 꺼뜨리기 위해서.
유진은 담배 꽁초를 손가락 사이에 넣고 굴리듯 장난치며 굳게 다물린 혜준의 입매를 관찰했다. 다음 수를 고민하며 깊은 생각에 빠질 때 혜준은 윗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곤 했다. 유진의 말을 덮치기 직전에는 들뜬 표정을 감추기 위해 일자로 말려들어 가곤 하는 그 고집스럽고 여린 살이 살짝 틈을 벌리더니,
"하세요."
차례를 알렸다. 유진은 불 꺼진 꽁초를 내려놓았다. 팔짱을 낀 혜준이 이런저런 수를 떠올리며 체스판 가까이 몸을 기울인 채로 유진의 차례를 기다렸다. 유진은 다음 수를 고심하는 척, 혜준의 동그란 정수리를 한참 내려다보며 담배를 집었던 엄지와 검지를 천천히 비비다가 무심코 혜준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인기척을 느낀 혜준이 굽혔던 허리를 바로 세우며 그의 손을 피해 멀어졌다. 유진은 혜준의 얼굴을 한번 흘긋 살피더니 혜준의 바로 앞, 검은색 진영의 가장 안쪽에 있던 흰색 폰에 손을 얹었다. 그대로 폰을 천천히 자기 쪽으로 4칸을 쭉 끌고 오더니 진로에 있던 혜준의 검은색 비숍을 잡았다.
"...... 폰은 후진을 못하는 거 아니었나요."
혜준이 의문을 제기하자 유진이 싱긋 웃으며 설명했다.
"몰랐어요? 폰을 반대쪽 칸 끝까지 진출시키면 퀸으로 등극할 수 있거든요."
혜준이 대꾸하는 대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 진지한 게임도 아니었건만, 자신이 계획했던 수가 어그러지자 불쾌해진 모양이었다. 사실 자존심 상할 것도 없었다. 어쨌든 혜준은 초보였으므로. 혜준이 체스판 위의 흰색 폰을 노려보자 유진이 장난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고 보니까 우리 같네요, 그렇죠?"
자신의 비유가 퍽이나 뿌듯했던 유진은 눈을 접고 씩 웃어 보였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던 혜준이 갑자기 얼굴을 펴고 피식 코웃음을 쳤다.
"왜 웃어요?"
"그래봤자 퀸이잖아요."
"네?"
혜준이 자신의 검은색 나이트를 집어올렸다.
"D4에 진출한 나이트는 그 다음번에 룩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거 아세요?"
혜준이 나이트를 대각선으로 한 칸 옮겨 유진의 비숍을 툭 쓰러뜨렸다. 룰을 몰랐던 게 민망해서인지, 질 것 같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혜준이 일부러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한 유진이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룰은 없어요."
"제가 만들었어요."
"그러면 안 되죠. 반칙이에요."
"고작 룰 하나 바뀐 거에 뭘 그렇게 신경 써요? 져도 잃을 거 없으시잖아요."
조롱기가 가득한 혜준의 대꾸에 할 말을 잃은 유진이 입을 다물고 눈살을 찌푸렸다. 쓰러진 흰색 비숍을 집어 든 혜준은 아랑곳 않고 또 한 번 자신의 나이트를 들더니 근처에 있던 하얀색 룩도 집어 들었다.
"비숍과 룩을 잡은 나이트는 한 번 더 움직일 수 있어요."
혜준이 한 손에 하얀 룩과 비숍, 검은색 나이트를 동시에 쥔 채로 체스판 위의 허공을 읽듯이 더듬거렸다. 그러는 것도 잠시, 아주 당연한 것을 묻는 양 뻔뻔한 목소리로 물었다.
"연속 세 번째로 움직이는 나이트는 어디로든 이동이 가능한 거 아시죠?"
"그럴 리가 없는데요."
혜준은 황망해하는 유진의 말을 무시하고, 손에 있던 검은색 나이트를 판위에 내려놓는 대신 그 자리에 있던 흰색 폰을 집어 들었다. 순식간에 흰색 말들을 세 개나 쥔 혜준이 손안에서 커다란 말들을 굴렸다. 나무 소재의 묵직한 말들이 서로 부딪치며 딸그락 거리는 소리를 냈다.
"한유진 씨 차례예요."
"뭐 하는 거예요, 대체?"
"싫으시면 제가 대신해드릴게요."
혜준이 말들을 가득 쥐고 있는 오른손 대신, 왼손을 뻗어 유진의 하나 남은 흰색 룩을 두 칸 움직였다.
"이제 제 차례죠."
혜준이 왼손으로 자신의 검은 말을 또 두어 번 움직였다. 유진의 시선이 말을 움직이고 있는 혜준의 왼손에서 미끄러져, 버거워 보일 정도로 커다란 말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잔뜩 힘주어 쥐느라 희게 질린 오른손에 닿았다. 혜준의 길쭉한 엄지가 룩의 매끄러운 기둥과 폰의 둥근 선단을 부드럽게 문지르고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귀에 열이 올랐다.
몇 번 더 말들을 움직인 혜준이 손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의자 등받이에 천천히 기댔다. 유진과 눈이 마주친 혜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서 두라는 듯 체스판에 손짓했다. 유진이 시선을 떨궈 체스판을 읽어보니 검은색만 밟아야 했을 비숍이 흰 칸 위에 놓여있는데다, 유진의 흰색 말 중 남은 건 킹과 퀸으로 등극한 폰 단둘뿐이었다.
"판이 엉망인데요."
"왜요? 그쪽이 불리해서요?"
"이혜준 씨가 멋대로 굴었잖아요."
"그래요? 전 룰대로 한 거 같은데."
아까 의뭉스럽게 굴었던 게 생각보다 혜준의 심기를 크게 건드린 듯했다. 순순히 대답하는 게 나았을까?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해버릴까? 하지만 3년간 계획 했던 일을 이제 와서 성급하게 터뜨려 버리기에는 준비가 덜 된 것도 사실이었다. 혜준이 이렇게 자신을 무작정 찾아올 것이라는 건 그만큼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유진이 초조하게 망설이며 입을 벙긋거리는 동안 혜준은 계속 손안에 쥔 말들을 굴리며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혜준의 얼굴에 서린 표정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실망한 것에 가까워 보였다.
"내가 안 찾아가서 기분 많이 상했어요?"
유진의 말을 듣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혜준이 손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제가 게임을 왜 싫어하는지 대답 아직 안 했죠."
혜준이 쥐고 있던 말들을 책상 위에 하나하나 일렬로 세워놓으며 말을 이었다.
"규칙을 지키는 게 싫어서예요. '원래 정해진 룰들'이 지겹고 답답해서요. 왜 폰은 한 칸씩만 갈 수 있는데요? 폰이 퀸의 역할을 하려면 퀸보다 여덟 칸을 더 전진해야 겨우 같아진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유진이 계속하라는 듯 의자에 기대며 팔짱을 꼈다. 혜준이 검지로 책상 위에 올려둔 흰 비숍의 모자를 툭툭 건들며 말했다.
"분명 이상한데, 이상하더라도, 규칙대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있는지도 몰랐던 룰 때문에 많은 걸 잃기도 하고요. 아까 저처럼. 그래서 규칙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혜준이 손가락을 튕겨 비숍을 쓰러트렸다.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하세요? 고작 체스 말로 끝나는 거요."
말없이 혜준을 바라보던 유진이 한쪽 입꼬리를 쓱 끌어올리더니 갑자기 체스판을 들고 휙 뒤집었다. 돌발행동에 놀란 혜준이 체스 말들이 우르르 떨어지는 소리를 각오하며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지만, 하단에 자석이 붙어있는 말들은 그대로 뒤집힌 체스판에 딱 붙어있었다. 혜준이 천천히 어깨의 긴장을 푸는 것을 보며 유진이 혜준의 머리 위로 체스판을 들어 올렸다. 잔뜩 짜증 난 듯한 혜준의 표정이 보였다.
"판이 뒤집어져도 남아있는 말도 있죠."
혜준이 손을 뻗어 거꾸로 붙어있는 말들을 툭툭 떼서 책상 위로 굴리듯 던졌다.
"퀸이 된 자신을 포기할 수가 없나 보네요."
"진짜로 잡힐 때까진 충분히 즐기고 싶잖아요."
'이미 한 번 잡혔던 적 있지 않아요?' 혜준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온 말을 삼켰다. 유진은 손으로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말들을 한쪽으로 미뤄두곤 체스판을 내려놓았다.
"이혜준 사무관, 왜 나를 보러 왔어요?"
"당신이 바하마를 위해서 일하는 게 확실한지 확인하려고요."
"그걸 왜 확인하고 싶은데요?"
"내가 여태 기다렸던 게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게 확실해지면, 주말에 점심이나 먹으러 가려고요."
유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반문했다.
"점심? 나랑요?
"그럴 리가요."
혜준이 코웃음을 치더니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손바닥에 관자놀이를 괴었다.
한유진은 눈치와 직감이 좋은 사람이었고, 그런 그의 뇌리에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승패를 가리기 전에 상대가 자리를 떠버리면 그대로 게임은 끝난다. 결말을 영원히 알 수 없는 채로. 유진은 결국 입을 여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가 이 판에서, 내려가기 전에 해야 할 게 있어요."
유진이 작게 소곤거렸다. 손에서 머리를 뗀 혜준이 무슨 소리냐는 듯 유진을 바라보자, 유진이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흰색 킹을 집어 혜준에게 건넸다. 의자에 등을 붙이고 있던 혜준이 말을 건네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바하마를 잡을 거예요."
유진이 혜준이 내민 손바닥 위에 말을 살짝 내려놓으며 혜준의 손 전체를 감싸 쥐었다. 뜨거웠다. 잠시 가만히 있던 혜준이 손을 빼내자 별다른 저항 없이 스르륵 놓아주었다.
"복수하는 거예요?"
혜준의 말에 유진이 얄밉게 입술을 쭉 내밀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은혜를 갚는 거죠."
"누구한테, 무슨 은혜를요?"
유진이 책상 위에 널브러진 말들을 천천히 하나하나 판위로 돌려놓았다. 혜준은 말없이 유진이 쥐여준 흰색 킹을 손안에 넣고 매만지며 원상복구되는 체스판을 바라보았다. 혜준이 들고 있는 흰색 킹을 제외한 모든 말들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나서야 유진이 입을 열었다.
"바하마 스파이가 아직 기재부에 남아있어요."
혜준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손끝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도와줄래요?"
혜준이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둔 손을 쥐었다 펴며 생각에 잠겨들었다. 이 긴장감과 두근거림의 근원은 무엇일까. 혜준은 답을 알고 있었다. 두려움과 동시에 묘한 기대감이 가슴 안쪽을 세차게 두드려댔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유진은 조용히 혜준의 대답을 기다렸고, 혜준은 비어 있는 손을 들어 손끝으로 자신의 턱 선을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손가락에서 알싸한 담배 냄새가 올라왔다. 혜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폰이든 퀸이든 상관없고요. 킹만 잡으면 돼요. 잡을 수 있어요?"
유진이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것이 바하마에 맞서는 일의 객관적인 난이도였고, 혜준에게 이렇게 쉽게 자신의 계획을 흘려버린 한유진의 솔직한 수준이었다. 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직접 흰색 킹을 원래 자리에 올려두고는 양손으로 책상을 짚었다. 유진이 혜준을 올려다보았다. 그림자가 진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유진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혜준의 보조개가 살짝 파이는 게 보였다.
"연봉 500만 달러, 플러스 옵션."
혜준이 말했다.
"그 정도 가치는 하셔야죠."
킹을 바라보던 혜준의 시선이 유진의 얼굴로 옮겨갔다. 지루한 체스는 끝나고, 이제 숨바꼭질 시간이었다. 술래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혜준과 눈이 마주친 순간, 유진은 자신의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이 사람은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다.
혜준이 말했다.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잡을 수 있다고 하세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