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definite Leave to Remain
Written By 모이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하는데 집 앞 벤치에 익숙한 듯 낯선 인영이 보였다. 이혜준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는 그의 앞에 가서 섰다. 덩치가 커다란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같은 장소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좀 야윈 것 같기도 하다. 그때는 큼지막한 코트를 입고 있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얇은 반팔 옷 차림인 지금과는 다르게.
"이제 와요?"
몇 년이 아니라 며칠 만에 만났다는 듯이 여상스러운 말투였다. 출소했다는 말을 며칠 전에 마리에게서 듣기는 했는데.
"퇴근이 늦네요. 기재부 일은 이혜준 사무관 혼자 다 하나 봐요. 못 보는 사이에 그만큼 유능한 인재가 되었다는 건가."
후덥지근한 여름밤의 공기가 몸에 달라붙었다. 의식적으로 숨을 다시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어야 했다.
월드컵 조별리그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느라 전국이 후끈 달아올랐다. 세종시 길거리에도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고, 시민들은 몰려나와 축제 분위기를 만끽했다. 응원가와 대~한민국 구호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혜준과 유진은 천천히 걸어 붉은 옷을 입고 축구에 몰입하는 인파를 지나쳤다.
"밥은 먹었어요?"
아니라는 대답에 혜준은 두부전골 집으로 향했다. 간판 앞에서 멈춰선 유진이 장난스럽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감방 갔다 왔다고 두부 사주는 거예요?"
그런 이유가 없지는 않죠. 혜준은 굳이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고 음식점 문을 열었다. 유진은 군소리 없이 따라왔다. 조용한 곳을 찾기는 글렀다. 식당에서도 월드컵을 피할 길은 없었다. 티비에서는 축구 중계가 요란하게 흘러나왔고 손님들은 불콰해진 얼굴로 공이 골대를 빗나갈 때마다, 때로는 안도의 때로는 안타까움의 탄식을 내뱉었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티비 화면을 한동안 응시하던 유진이 혜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회한 기념으로 국가대표 유니폼 사줄까요? 이혜준 씨도 밤낮으로 국가를 위해 일하잖아요. 국가대표 사무관 이.혜.준."
"아니요. 빨간색 별로 안 좋아해요."
"왜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런가요.
"우리 처음 만난 날도 이런 대화 했었어요. 기억나요?"
혜준은 웃고 말았다. 그럼요. 초면에 다짜고짜 붉은색이 어울리겠다고 하던 황당한 남자를 어떻게 잊겠어요. 두부전골이 나왔다. 유진은 배가 고팠는지 꽤 열심히 먹었다.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렸다가, 중계를 봤다가, 혜준의 얼굴을 쳐다봤다가, 바쁘던 유진이 한순간 심각해졌다.
난 월드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2002년에 한국에서 월드컵을 개최했던 거 기억하죠. 난 그때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학생이었어요. 한국과 미국이 경기를 치르던 날 축구부 활동을 하는 친구에게 네 나라로 돌아가란 소리를 들었어요. 그전까지는 똑같이 학교 다니고, 선생 욕을 하고, 농담따먹기를 하는 친구였는데. 미국이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를 이기지 못하는 순간 유진 한은 '우리 미국인'이 아니게 되었어요. 나는 축구에 관심도 없었는데. 여름방학에 노래 연습해야지, 그래서 고등학교 연극부에 꼭 들어가야지. 그 생각뿐이었는데.
"피아노를 치는데 아버지가 끼어들었어요. 혜준아, 쨍하고 해뜰날 쳐 봐라. 술 취한 목소리로 음정도 박자도 엉망인 노래를 부르셨어요. 나는 열심히 맞춰서 반주하려고 노력했고요. 그날 아버지 방에서 배경으로 대한민국이 4강에 진출했다는 티비 소리가 흘러나왔던 걸 기억해요. 며칠 후에 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피아노도 팔고 고모 집으로 들어가야 했어요. 뉴스에선 축구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다고 하던데, 우리 가족에겐 아니었어요. 축구대표팀의 업적이 아버지에게는 위로도, 도움도 되지 못했어요. 온 나라가 떠들썩했지만 나와는 상관이 없었어요. 나도 월드컵을 좋아하진 않아요."
"월드컵은 대한민국에게, 한국인에게 자랑스러운 성과였는데, 우리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네요. 나에게 고국이니 고향이니 이런 것들은 쓸모없어졌어요. Homeland도 hometown도 중요하지 않아요. 이혜준 is my home. 그거면 돼요. 당신 옆에 있게 해줄래요?"
"'우리'라는 말 괜찮은데요. 앞으로 우리에게 해당 사항이 있는 일들을 만들어갈까요, 한유진 씨."
혜준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혜준의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은 유진은 한동안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혜준을 와락 끌어안았다.
골~~~!! 대포알 같은 슛으로 골망을 갈랐습니다! 흥분한 캐스터가 한껏 샤우팅을 해댔다. 골을 넣은 선수가 우리 팀이었는지 상대 팀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 적어도 한유진은 그런 줄 알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는 했으되, 생각보다 옛 세상과 굉장히 비슷했다. 사랑으로 구원받고 순식간에 개과천선하는 일은 영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숫자로 견고하게 쌓았던 성이 무너진 자리에는 사랑이라는 새싹이 돋아났지만, 폐허를 치우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이혜준이 '그냥 사람'이라고 말해줄 때는 마냥 좋았다. 거대조직의 부속품으로 기능해야 쓸모를 인정받는 유진 한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존엄한 인간 한유진. 악착같이 숫자로 가치를 증명하려 덤비지 않아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겠다는 말은 달콤했다. 그 전화 통화에 대한 기억으로 교도소 생활을 버텼다.
한국에서 세계적인 사모펀드 바하마의 한국 지사장이 아닌 그냥 사람 한유진으로 살아가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어머니의 고향은 거대기업이라는 배경도, 높은 직책도, 고액의 연봉도 없는 전과자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곳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더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아들, 이혜준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연인이 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바하마는 인간 유진 한을 거대조직의 부속품으로 전락 시켜 굴렸지만 명함 한 장으로 국회 기재위원장에게 닿을 수 있는 권력을 쥐여주기도 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바하마라는 성채가 무너진 잔해에는 새로운 딱지가 두 개 붙었다. 전과자와 백수. 사랑이 달콤하다고 해서 추락이 씁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추락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의 도약이라고 믿었다. 이혜준이 옆에 있는 동안은. 혜준이 일하는 동안에 돌아다니며 마주한 새로운 세계에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냉대를 다시 마주했다.
혜준은 유진의 감정변화를 더디게 눈치챘다. 직장생활이 바쁘기도 했고, 유진이 혜준이 옆에 있는 순간만큼은 혜준에게 온 정신을 쏟느라 다른 고민은 머릿속에서 싹 날려버리는 탓도 있었다. 어두운 밤에 이혜준 옆에 누워 있을 때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곁에서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상관없다고 다짐했다. 별을 보며 다졌던 마음가짐은 쨍한 햇볕에 하얗게 바랬다. 너무나 쉽게 바랬다. 냉대를 견디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상처를 안 받게 해 주지는 못했다.
20여 년에 걸쳐 굳어버린, 연봉의 액수가 사람의 사회적 가치를 규정한다는 가치관을 하루아침에 떨쳐 버리기란 불가능했다. 유진은 직업을 구하러 다니며 수없이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금융계 인사에게 감옥생활이 큰 흠이 되지는 않았다. 바하마의 한국 지사장을 지낸, 한국말도 유창한 유진을 데려가려는 회사들이 줄을 섰다. 몸값도 제법 후하게 제시했다.
문제는 그 회사들이 하나같이 바하마보다 더 지독하게 돈을 좇으면 좇았지 도덕적으로 더 나은 부분은 없다는 점이었다. 윤리적으로 거리낄 일이 없는 직장을 알아보니 죄다 터무니없는 박봉이었다. 대부분 바하마를 적대적으로 여기는 회사들이라 유진을 채용하는 데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당신 같은 사람이 여기 왜 옵니까? 무슨 꿍꿍이예요? 바하마에서 작은 반대 세력까지 다 쓸어버리려고 보냈습니까? 교도소에서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유진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기 일쑤였다.
취직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다 나준표를 마주친 일이 화근이 되었다.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에 애로사항이 많아 야근을 밥 먹듯이 한다는 나준표의 얼굴에는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얇은 안경테 너머로 졸음이 가득한 눈이 혜준의 어깨에 팔을 두른 사람을 보자 휘둥그레졌다.
"유진 한 지사장님! 몇 년 전에 뉴스에서 소식을 들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다시 보네요? 잠깐 빵에 다녀오는 일이야 우리 경제인들의 세계에선 큰일도 아니고, 요즘은 무슨 일을 하시나?"
유진이 그답지 않게 대답을 얼버무렸다. 나준표는 이런 일에는 쓸데없이 눈치가 좋았다.
"아하하하 백수구나! 백수! 바하마가 팽한 사람을 주워가는 곳은 없나 보지요? 회사 빽이 든든할 때야 전과쯤이야 우습지만, 혈혈단신이 되면 사정이 다르지. 뭐... 한국에 학연도 없을 테고. 한국 사회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에요."
힘이 들어가는 유진의 주먹을 혜준이 꼭 붙잡고 토닥였다. 나준표는 청탁이라도 받을까 겁이 났는지 꺼림칙함이 역력한 얼굴로 서둘러 멀어졌다.
다음날로 유진은 입사 제의를 거절했던 실레트로 캐피털에 연락을 넣었다. 바하마의 라이벌이자 높은 악명만큼이나 두둑한 연봉을 제시했던 사모펀드였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속담을 배운 적이 있어요. 나라고 뭐 다르겠어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이거예요. 나를 가장 인정해 주는 곳도 여기고요. 사모펀드라고 다 나쁜 짓만 하는 건 아니에요. 회사의 부실을 정리하고 경쟁력을 높여서 국가 경제에 기여한다고요."
"회사에서 서민들의 가계를 파괴하면서 돈을 벌기로 할 경우에, 한유진 씨만 동참하지 않을 수 있어요? 없잖아요. 비윤리적인 일이 회사에 큰 이익을 가져다줄 때,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니 하지 말라고 자문할 수 있어요? 못 하잖아요. 한유진 씨, 이러면 바하마 시절과 달라진 게 뭐예요?
만약에 기재부와 협력할 일이 생긴다면 이혜준 씨 커리어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며 설득해 보았지만 혜준의 태도는 강경했다.
"돈이 되면 한국 기업을 초토화하고 떠날 거잖아요. 한국 경제에 해악을 끼치고 자기들 배만 불릴 거잖아요. 나는 그런 일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요. 사회가 인정하는 가치와 인간 이혜준이 중시하는 가치가 항상 일치하진 않아요. 양립할 수 없는 가치들도 있어요. 나의 가치를 맹목적으로 따르라고 강요할 수는 없으니 한유진 씨가 선택하세요."
이렇게 빨리, 이렇게 크게 싸우게 될 줄은 몰랐다.
혜준과 유진 사이에 조금 냉랭해진 기류가 흐르는 채로 며칠이 흘렀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혜준도 알았다. 가까운 곳에 좋은 예가 있었다. 고모부는 배추 농사를 짓겠다고 내려간 시골에서도 위험한 투자에 손을 대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주식투자에 대해 동네 주민들에게 사기를 쳐 상당한 금전적 손실을 끼친 뒤에 마을에서 쫓겨났다. 마리하고만 가끔가다 연락이 닿았는데 사람 꼴은 갖추고 사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사람은, 특히 남자는 고쳐 쓰는 거 아니야. 나처럼 30년 걸려서 깨닫지 말아라, 혜준아." 안부를 묻던 고모는 전화 너머로 자조를 섞어 말했다.
마리의 의견은 달랐다. "야,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일단 편하게 만나봐. 누가 당장 결혼하래? 어차피 한유진의 인품이 훌륭해서 끌린 것도 아니잖아." 허를 찔린 혜준은 허탈한 표정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리의 말이 맞긴 맞았다. 아직 무슨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너무 박하게 굴었나.
누가 아파트는 이웃에게 관심이 없는 삭막한 곳이라고 했던가.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나쁜 소문은 빠르게 돌았다. 뒷말은 슈퍼 주인, 미용실, 단골 음식점 등으로 순식간에 퍼졌다. 206동에 사는 공무원 집에 드나드는 시커먼 남자가 전과자라더라. 외국인이라던데? 정말? 에이, 한국말 잘하던데. 검은 머리 외국인이 더 무섭다잖아.
유진의 인사를 반갑게 받아주던 경비가 굳은 얼굴로 묵례만 하고 지나가거나 어제까지 젊은 총각이 싹싹하다며 반색하던 식당 주인의 말투가 은은하게 차가워지는 일이 늘었다. 호기심에 찬 하찮은 악의를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많았다. 모멸적인 시선은 서서히 스며들어 자잘한 생채기를 남겼다. 따가운 상처들이 하나둘 늘었다. 한국도 미국도 나의 나라가 아니라는 현실은 괜찮지만은 않았다.
하루는 뒷말하던 사람과 시비가 붙었다.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은 혜준이 헐레벌떡 뛰어갔다. 이거 빵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놈이네? 선량한 시민들이 사는 동네에서 왜 어슬렁거려요? 직업도 없고, 소속도 없고. 수상한데? 담당 형사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상대방도 기세가 등등해졌다.
내 세금으로 월급 받는 주제에 말이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생각이나 할 것이지 웬 쓰레기 같은 놈이나 달고 다니고. 국민신문고에 민원 넣어 버릴 거야! 혜준이 넣고 싶으면 넣으라고, 저는 잘못한 게 없기 때문에 손해 볼 것도, 사과할 것도 없다고 맞섰지만, 눈이 돌아간 남자는 계속 날뛰었다. 미국 영사관에 연락하고 변호사를 불러와서 해결하겠다는 말에 겨우 잠잠해졌다. 하루 벌어 하루 산다는 읍소에 혜준의 마음이 약해졌다.
"저런 놈은 법의 매운맛을 보게 해줘야 하는데."
"돈의 매운맛이겠죠. 한유진 씨 돈으로 산 변호사의 매운맛."
"돈이 뭐 어때서요. 이런 경우에는 적재적소에 잘 쓰는 거 아니에요?"
"돈이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우리도 어려서부터 재산의 유무에 따라 대우를 달리 받는 세상을 겪었으니 그런 세상을 지속하는 데 보탬이 되지는 말자는 말이에요."
"경찰이 내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더라고요. 출소한 지 얼마 안 되는 외국인이라니까 당연히 잘못했겠거니 단정을 지어버리던데. 미국에서 이런 취급 수없이 당했지만 오랫만에 받아도 엿같기는 마찬가지예요.
이혜준 씨는 왜 그렇게 애국심이 투철해요? 국가가 해준 것도 없는데? 아버지를 외면하고 가족을 망가뜨린 국가가 원망스럽지도 않아요? 그리고 애국심 같은 건 너무 고리타분한 이념 아닌가, 21세기에."
"애국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현재 대한민국의 공무원이기 때문에 공무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예요. 직업을 떠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
"나라가 나에게 해준 것이 없다는 말은 맞죠. 아버지를 지켜 주지도 못했고요. 그러니까 더 나은 나라를 만들어 보려고 이 일을 하는 거예요. 부자와 재벌만 위하지 않고, 보통 사람들도 위하는 나라, 평범한 사람들도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아주 작게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서 공무원이 되었다고요. 기재부 공무원 1명이 천지개벽을 일으킬 수는 없겠죠. 나도 알아요. 그렇지만 작은 노력이 모여서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어요."
"천지... 괴벽?"
"불리할 때만 한국어 서투른 척하지 마시고요, 한유진 씨."
유진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혜준을 끌어안았다.
"잘못했어요. 그리고 이혜준 씨 말이 맞아요. 각자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면서 사는 거죠. 나는 한때 그게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자본주의 정글에서는 살아남아서 맨 위로 올라가는 일이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누구도 나를 차별할 수 없도록 힘을 갖고 싶었거든요."
"생각'했'고? 지금은 아니라는 말이에요?"
"이혜준한테는 못 당하겠네, 정말. 놓치는 게 없어요. 이혜준이 다른 길도 있다는 걸 알려줬잖아요. 취직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볼게요. 연봉을 조금 깎고 윤리와 관련된 조항을 계약서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노력할게요. 하루아침에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어도요. 이혜준이 나의 home이라고 했잖아요. 잠시 정도를 벗어나더라도, 좀 헤매더라도, 반드시 집으로 돌아올게요. 그러니까 나를 내쫓지 말아요. 힘들고 오래 걸려도 계속 같이 가 줘요."
"내가 힘들다고 포기하는 거 봤어요? 한유진 씨는 아직도 나를 잘 모르시네요."
혜준은 까치발을 들어 남자의 목에 팔을 감았다. 손에 힘을 주어 당기자 상기된 얼굴이 얌전하게 끌려 내려왔다. 그렇게까지 기대하는 눈빛일 필요는 없는데요 한유진 씨. 그래도 그 눈빛이 효과가 전혀 없지는 않아서 이혜준은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잠깐 부딪쳤다 떨어지려 했던 입술이 오래 머물렀다.
새파란 고등학생 시절부터 가진 돈의 액수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뼈에다 새겼다. 머리를 넘어 몸에 밴 가치관은 찬란한 사랑만으로는 고쳐지지 않았다. 사랑은 위대하지만 습관은 구질구질하다. 돈 위주로 생각하는 버릇을 고치는 과정은 길고 지루했고, 위대함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없었다. 그 지난한 과정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옆에 있어 다행이었다.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한 대신 생각은 주저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여자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내지만 생각을 감추는 데 능숙한 남자는 손을 잡고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유진이 발을 맞추기 시작했다. 혜준이 오른발을 내밀 때 오른발을, 왼발을 내밀면 왼발을 내딛었다. 혜준이 하나둘, 하나둘 구령을 붙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에필로그
유진은 저녁에 큼지막한 쇼핑백을 손에 들고 들어왔다. 내용물을 주섬주섬 풀어헤치더니 흰색 축구 국가대표 유니폼 두 벌을 꺼냈다. 큰 사이즈 하나, 작은 사이즈 하나.
"우리 유니폼 나눠 입고 월드컵 결승전 봐요."
하얀 유니폼을 혜준의 몸에 대 보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이즈는 잘 고른 것 같네. 내가 눈썰미는 제법 괜찮죠.
"냉장고에 맥주 아직 남았죠? " 치킨도 시켜야 하나... 축구에는 치맥이라던데 이참에 해보자는 유진은 들떠 보였다.
"나 축구 별로 관심 없는데요. 한유진 씨도 마찬가지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왜?"
"나도 관심 없어요. 혜준씨랑 같은 옷 입고 응원해 보고 싶었어요. 한국에선 커플티라고 하던가?"
"결승은 한국팀 경기도, 미국팀 경기도 아닌데요?"
"무슨 상관이에요. 우리 둘이 같은 옷을 입고 나란히 앉아 함께 보는 게 중요하지."
"그런데 왜 흰색 유니폼이에요? 한유진 씨 붉은색 좋아하잖아요. 한국팀의 상징도 붉은색이구요."
"이혜준 씨가 별로 안 좋아하니까요. 이혜준 씨가 붉은 색을 입느냐 마느냐보다 나랑 같은 옷을 입어준다는 게 더 중요하단 걸 깨달았어요.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가 중요하지 않아진 만큼 이혜준 씨가 무슨 색깔을 입는지도 중요하지 않아졌어요. 뭘 입든, 이혜준은 이혜준이지. 내 옆에 있는 이혜준. 그거면 돼요."
"이제 철 좀 들기 시작했네..." 혜준은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혜준 씨 나한테 뭐라고 했어요? 나 잘 못 들었는데?" 냉장고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던 유진이 몸을 일으키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아니에요. 치킨은 내가 시킬게요. 냉장고에 붙은 전단지 좀 줄래요?"
필요 이상으로 귀가 밝단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