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andem
Written By TY
1.
이혜준이 그를 택했다. 아니, 적어도 그에게 자신의 손을 잡아볼 수 있는 기회를 베풀어줬다고 할 수 있겠다.
다시 시작할 거라고, 더 강해져서 돌아오겠다고, 그 날이 오면 나를 만나주지 않겠냐는 그의 말에 이혜준은 당신은 나에게 더 이상 증명할 것이 없다고 했다. 그가 내걸었던 조건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 혜준은 그의 약속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당신은 이미 이 곳의 사람이라고, 당신의 내면을 나는 이미 봤다고 말해준 것이다. 이혜준은 그렇게 판을 뒤엎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유진 한이 평생동안 짊어지고 온 인정 투쟁의 굴레를 벗겨냈다. 유진은 그 순간의 충격을 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혜준이 그에게 완전한 자유를 약속한 것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조건을 제시한 것일뿐. 그 뒤에 숨겨둔 네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 보지 않겠냐는 권유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그 부름에 응답하고 싶었다. 다른 형태의 굴레나 속박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상관없이.
그러니까 더 이상 그 속에 숨어있지 말아요,
한유진씨.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거역할 수 없었다.
2.
혜준은 종종 곽동현을 찾아갔다. 엄밀히 따져선 이젠 그를 찾을 이유가 더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고모가 그의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와 자신 사이의 또 다른 연결고리인 채이헌도 한국을 떠나고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준은 짬이 나면 그의 병실을 찾아가서 말동무를 해주곤 했다.
처음에는 어떤 의무감에서였다. 본의 아니게 가족도 친우의 자식도 아닌 자신이 그의 마지막 말을 듣게 되는 줄로만 알았던 그 순간 때문에 일종의 부채감을 느꼈던 것이다. 혜준은 그가 중환자실로 다시 실려가는 것을 보고선, 흔들린 마음을 추스리면서 그가 해주었던 말들을 휴대폰 메모장에 적었다. 혹시라도 정말로 이것이 그의 유언이 된다면 가족에게 전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특별히 가족에게 전해야겠다 싶은 구석이 없었다. 당신들이 몸 바쳐 만들어 낸 세상이 나에게는 그리 아름다운 곳이 되지 못 하오, 하는 혜준의 지적이 그렇게도 아팠다는 말은, 아마 본인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고민이 그로 하여금 홀로 귀국하여 외롭게 병마와 싸우기를 택한 것이 아닐까, 하고 혜준은 그의 마음을 헤아려봤다. 혜준은 이 사실은 홀로 간직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은 아니었다. 그간 혜준은 그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한참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다가도 계면쩍게 웃으며 “아이쿠. 내가 또 주책을.” 하고 이야기를 마무리하곤 했다. 혜준은 그것이 싫지 않았다. 혜준은 언제나 그가 갸냘픈 목소리로 “그렇다고 우리가 잘못 산 건 아니잖아?”하고 질문을 던지고선,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영혼을 팔 수 있겠다. 사실 그런 생각도 했던 세대야.” 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던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그와 같은 세대는 아닐지언정 그와 유사한 궤도를 걸었을 또 다른 사람에 대해서 상상을 하게 되곤 했다. 혜준은 그 남자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소개할 것인지가 궁금했다.
3.
검찰청에 제발로 출두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긴급체포 되었다. 사실 예상하지 못 한 바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기분이 끔찍하진 않았다.
예상치 못했던 부분은 뉴욕 사무실에서 변호사를 구해넣어줬다는 점이다. 미국 시민, 유진 한과의 관계는 끊어내고 오로지 중국 인민, 진펭과만 비즈니스 관계를 이어갈 것이라고 하더니, 의외지 않은가. 아마도.
A. 그가 벌려놓은 ICSID 제소건으로 회사가 생각보다 바빠져서 그에게 딸린 스태프들을 해고하는 일이 뒷전으로 밀렸거나
B. 티나 바하마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무른 사람이었거나
C. 섀넌 루치오가 그의 생각보다는 자신을 많이 좋아했거나 (그러나 이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D. 지난 크리스마스에 비서실에 챙겨줬던 선물들이 엄청나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쪽이 되었든 그가 뿌린대로 거두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한국 사법체계가 경제사범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직접 체험해보겠다고 이러저러한 씨앗들을 뿌려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앞날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은 없이 검찰청에 출두했는데 체포명령이 집행되려는 찰나에 변호사가 알아서 나타나줬으니 운이 좋다고 해야겠지. 그는 이 곳을 벗어나면 해야 할 일 목록에 다음과 같은 항목을 추가했다.
1. 누가 그에게 변호사가 필요할 거란 걸 본사에 알렸는지를 알아내기
2. 그 사람과 원거리에서도 훌륭한 일처리를 해준 비서실에 감사인사(+알파)를 전하기
변호사는 일단 구속적부심을 신청하긴 하겠으나, 허재를 필두로 해서 기획재정부와 관련된 스캔들이 눈더미처럼 커지게 된 이상, 사법부에서 이 스캔들에 대해서도 강하게 나올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유진은 이는 자신이 감수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변호사는 유진 한은 검찰에 자진출두해서 장시간의 수사에도 성실히 임했으며, 앞으로의 수사 과정에도 충실히 협조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검찰은 최초에 협조를 구했을 때 연락이 두절 되었던 점과 외국인으로서 해외 도주 위험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서 구속수사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법원은 검찰의 편을 들어줬다. 아마도 그는 재판 과정 내내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는 그와 이혜준 모두에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줄 것이다. 그는 그 시간이 혜준으로 하여금 다른 결정을 내리게 하지 않을까 조금은 두려웠다. 하지만 만일 그런 미래가 온다고 해도, 그건 그때 가서 부딪히면 된다. 유진 한은, 아니, 한유진은, 이혜준의 마음을 다시 얻어내기 위하여 성실히 분투할 것이다. 검찰 조사 따위에 그가 들인 노력-그걸 노력이라고 하기에도 무색하지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4.
고모는 사람은 목구멍에 음식이 들어가면 살게 된다고 했다. 이혜준은 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원론적으로는 맞는 말이지. 다만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목표라거나, 동기부여라거나.
혜준이 그와 마지막으로 통화를 했던 것은 이제 거의 일 년 전의 일이다. 그는 검찰에 자진출두했다. 그러나 이는 언론에 제대로 보도조차 되지 않았다. 혜준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순전히 이 사건을 꾸준히 쫓았던 마리가 언론의 외면에 분개해서 혜준을 상대로 꾸준히 한풀이를 해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경제기사 쓴다는 사람들이 다 같이 형사재판 보도에만 몰려 있으면 되겠어?”
그렇지만 유력 대선주자로까지 거론되었던 허재 경제 부총리가 살인범으로 전격 체포된 것은 사건이 커도 너무 컸다. 피해자가 그간 대한민국 경제정책의 기틀을 잡는데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채병학 교수였다는 것 또한 기자들에게는 큰 관심거리였다. 호사가들은 더 큰 음모가 있는게 아니냐는 말까지 하곤 했다. 현 정부와 채병학 교수 사이에서 주요 정책을 놓고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냐는 식으로. 그러다 보니 일개 기재부 공무원이 해외펀드의 뒷돈을 받아챙기고 정부가 거대 주주이던 은행의 임원에게 뇌물을 증여하는 브로커 짓을 했다는 것은 사건 축에 끼지도 못 했다.
당시의 혜준은 혜준대로 바하마 코리아 측에서 제기한 ICSID 소송 문제를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도 바빠서 마리가 기대했을 수준의 반응을 보여줄 수 없었다. 허재에게서 얻어낸 녹음 파일을 통해서 드디어 실마리가 생긴 때였다. 혜준이 잘 시간과 먹을 시간을 쪼개서 발로 뛰고, 사람들을 설득한 것이 결실을 맺었던 때. 결국 바하마 코리아는 ICSID에 제기했던 소를 취하했다. 혜준과 국금과 사람들은 이 결정을 미리 전해 들었지만, 회식을 하러 간 식당의 TV에서 앵커의 목소리로 이 소식이 전해졌을 때 혜준은 또 그 짜릿한 감각에 눈을 감았다. 승리였다.
그렇게 한숨을 돌리고 나니, 그의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혜준은 그의 재판 과정을 지켜봤다. 혜준이 놓치는 부분은 마리가 기자의 집요함과 오로지 진마리만이 갖고 있는 이혜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직감을 통해서 보충해주었다. 좋은 변호사를 썼다. 검찰 측에서 벌써 휴정을 몇 차례 요구했다더라. 그러다보니 전체적으로 재판 과정은 길어질 거 같았지만, 형량은 벌금이나 집행유예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만일 실형이 나오더라도 재판 기간 동안 수감된 것을 고려하면 추가로 옥살이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수트는 잘 받더라, 등등.
혜준은 가끔 그에 대해서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일들이 잦아졌다. 결국 이혜준은 결심을 내렸다.
***
면회 신청은 생각보다 귀찮았다. 부총리를 만날 때는 어떻게 했었더라. 그때도 이렇게 했던가. 막무가내로 구치소에 찾아갔던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좀 흐렸다. 교정본부 사이트 각종 메뉴를 클릭해보고 있자니 지난 주말에 봤던 드라마 생각이 났다. 거기선 전화로 협조 요청만 하고도 미결수를 만나볼 수 있었는데. 혜준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만일 그의 삶이 조금만 더 드라마 같아졌다가는 도저히 제명에는 못 죽을 거다.
혜준은 마리를 통해서 그의 수감번호를 알아냈다. 그리고 이혜준은 드라마 속 주인공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이기 때문에, 교정본부 사이트를 통해서 면회를 신청하고 그 일정에 맞춰서 반차도 신청했다.
목구멍에 음식만 들어가도 사람은 살게 된다. 그렇지만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한 법이다. 구치소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혜준은 이것이 오직 그를 위한 일이라는 거짓말을 스스로에게 늘어놓지는 않았다. 이혜준은 그렇게 비겁한 사람이 아니니까.
5.
그의 표정은 제법 볼 만 했다. 입에 잔뜩 힘이 들어가서 입술이 긴장감이 팽팽한 선을 그리는가 하면, 당장이라도 뭘 물어보고 싶은 것처럼 쑥 튀어나왔다가, 다시 단정한 선으로 모양을 바꿨다. 입꼬리는 계속 들썩거렸다. 마치 깜짝 선물이라도 받은 아이 같았다. 아니, 내가 온다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요. 혜준은 웬지 친근하게 타박을 하고 싶었다. 가슴이 간질간질한 것이 웃음이 날 것도 같았다. 그렇지만 표정을 애써 가다듬은 혜준이 그에게 건넨 것은 평범하고, 어쩌면 좀 딱딱한 인삿말이다.
“오랜만입니다.”
그는 유리벽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앉았다. 그렇지만 몸이 가만히 있지 못 하는 것을 봤을 때 좀 더 가까이 다가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리는 본 적 없이 짧았고, 뺨은 조금 야위었다. 하지만 눈에는 여전히 특유의 총기가 가득했다. 혜준은 마음이 놓였다.
“그렇네요.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지금 업무시간 아닌가요?”
“반차 썼습니다.”
“그럼 일 때문에 온 건 아닌가 봐요.”
“드라마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에요? 기재부 직원은 법무부 일 못 해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입꼬리를 쭉 끌어내리며 제법 밉상스러운 표정까지 짓는 걸 봐선 글쎄요, 내가 그 말을 다 믿어도 되나, 의 제스처다.
“또 모르죠. 이혜준 사무관은 재능이 많잖아요. 내가 알아서 조심해야지.”
“단순히 면회차 온 겁니다.”
“그럼, 이혜준씨. 무슨 용건이실까요?”
혜준은 그가 주는 사인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 정말 사적인 대화를 하는 거죠? 아니면 빨리 말해줘요. 혜준은 그가 자신이 지금부터 할,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엔 대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가 궁금했다.
“내가- 충분한 답을 하지 않았더라고요.”
“무슨 뜻이예요?”
유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혜준은 무릎 위에 얹어뒀던 두 손을 모아 단단히 깍지를 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한 행동이다.
“한유진씨가 했던 말에 대한 응답 말이예요. 그러니까.”
그도 혜준이 던지는 신호를 알아차렸다. 다만 그 뒤로 혜준이 어떤 말을 던질지를 모르는 유진은 그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혜준을 빤히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혜준은 그와 눈빛을 교환하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이 날 찾아온다면, 나는 당신을 만날 거예요. 바로 돌려보내거나 쫓아내지 않아요. 내가 기다릴 거란 뜻이기도 해요. 당신이 준비가 되었을 때, 나와 함께 하고 싶다면, 날 찾아와 줘요.”
그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 했다. 아마 이 사람이 이렇게 조용한 건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겠지. 그는 그 어떤 답도 내어놓지 않았지만, 혜준은 그의 표정에서 자신이 원하던 그 모든 것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대답, 했습니다.”
혜준은 까딱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여전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혜준은 그의 눈빛이 자신의 뒤통수에 꽂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6.
그는 혜준을 찾아왔다. 그들은 미리 약속을 잡고 혜준의 집 근처의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만났다. (혜준은 그 사이에 번호를 바꿨다. 그렇지만 어떻게 알아낸 건지 그는 새로 바뀐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혜준은 이 뒤에 숨어있을 이야기는 눈감아주기로 했다.)
혜준은 아메리카노를 골랐고, 그는 디카페인 녹차를 주문했다. 그는 이 늦은 시간에도 커피를 마시냐고, 한국인들은 카페인 과잉이 심하다는 농담을 했는데, 혜준은 깨끗한 정신으로 이 대화를 나누기 위함이라고 말을 딱 잘랐다. (혜준이 전날 예상치 못하게 야근을 해서 피곤했지만, 이 약속을 미루고 싶지 않아서 하루 종일 커피를 들이켰다는 걸 유진이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참 장소 선정이 비즈니스적이긴 하네요. 자본주의의 꽃, 스타벅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도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제법 멍청하고, 또 귀여운 얼굴이었다.
그들은 연애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머그잔을 반납하려고 정리하면서 처음 손이 스쳤고, 카페를 나서면서는 그들은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있었다. 멀다면 먼 길을, 짧다면 과격하게 짧은 길을 지나서 드디어 잡은 손이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졌던 서로의 체온이 어느 순간 비슷한 온도로 바뀌었고, 둘은 그 순간을 만끽하며 밤거리를 걸었다.
혜준의 아파트에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의 발걸음은 느려졌다. 가로등이 하나 꺼진 코너에서, 혜준은 그의 코트깃을 끌어당겨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가 열렬히 반응해오자 혜준은 오랫동안 계획해왔던 대로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고 격렬했다. 혜준은 남자의 목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짐승 같은 소리가 몹시 만족스러웠다.
혜준은 그를 자신의 아파트로 초대했다.
7.
“연수원에 있을 때 허재 부총리가 특강을 왔었거든요. 그때 그런 말을 했어요. 경제하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고.”
그들은 편안한 차림으로 앉아 심야뉴스를 보고 있었다. 대통령의 자살 후 한참 시끄러웠던 수마르에서 후임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고, 드디어 내정이 안정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소식이었다. TV에서는 신임 대통령의 취임사가 자료 화면으로 흘러나오는 가운데, 혜준은 느닷없이 허재의 이야기를 꺼냈다.
한유진은 이혜준이 가끔 부끄러워하면서도 자랑스럽게 내어놓는 경험담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이혜준의 입에서 나오는 꾸밈없고 단단한 단어들에 비하면 그 자신이 가끔 늘어놓았던 모험담이 얼마나 치기어린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곤 했다. 경호원이 필수였던게 뭐 그리 대단한 자랑이라고. 이혜준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아니. 보인 적이 있던가.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곁눈질로 혜준의 옆모습을 살폈다. 혜준의 시선은 TV 화면을 떠나지 않았다.
“수마르는 바하마에서 대출을 받아선 안 되었다고 생각해요. 특히나 전염병 퇴치를 위해서 특별히 편성받은 기금을 담보로는. 잘못된 사람이 경제를 했고, 그 의지를 아무도 꺾지 못 하면서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한 거죠.”
그는 혜준의 평가에 동의했다. 그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니다. 수마르는 유니세프에서 내어준 구호기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는 안 됐다. 그 돈은 국내에서 시급히 필요한 것이기도 했거니와, 정부에서 추가 대출을 받고자 한 이유도 실제 유치 가능성조차도 불투명했던 투자건 때문이었으니까. 수마르의 대통령은 도박에 국운을 걸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바하마의 파트너로서 그가 당시에 쥐고 있던 은행에겐 수마르의 대출 신청을 거절해야 할 의무가 없었다. 그리고 상환 기일을 앞두고 수마르의 사정을 특별히 봐줄 의무 따위도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이혜준이 그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바하마가 그가 잘못된 선택을 내리는 것에 동조할 필요도 없었겠죠. 최후의 일격을 날릴 필요도 없었을 거고.”
이 부분에 있어서도 그는 혜준의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그의 합리적인 선택들이 혜준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지 않았나. 그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잘 살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오로지 이혜준을 위해서. 그는 어떤 말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혜준의 손을 잡았다. 그가 손에 힘을 살짝 주자 혜준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는 혜준이 모쪼록 그에게 호의적인 쪽으로 이 제스처를 해석해주길 바랐다.
***
휴일 아침이다. 자주 그렇듯이 그가 혜준보다 먼저 눈을 떴다. 혜준이 일어나기 전에 아침을 준비해야 한다. 그렇지만 곁에 있는 혜준의 온기가 유달리 아쉽게 느껴져서 도저히 침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들숨날숨에 맞춰서 혜준의 상체가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늘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 날, 이혜준 대신 자신이 총을 맞았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는 밤 사이에 사방팔방으로 뻗친 혜준의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짜피 일어나면 혜준은 또 머리를 긁으면서 까치집을 만들테지만 말이다. 이 생각에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그것도 아주 오래 전, 고등학교 스페인어 수업시간에 배웠던 구식 사랑노래가. 내 사랑,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당신은 모르겠죠, 앞으로도 모를테고요.
“노래 불러요?” 한껏 잠에 취한 목소리다. 혜준은 눈도 채 뜨지 못 했다. 그렇게 이른 시간은 아닌 거 같은데. 어제 그렇게 늦게 잔 것도 아니고. 이번주에 야근이 많았던 탓일까. 그는 혜준의 뺨을 쓰다듬었다. 내가 당신의 마음을 얻어낸다면, 내 사랑, 그대는 늘 내 곁에 있어줘야 해요.
“알람 일부러 꺼놨는데. 인간 알람시계가. 때맞춰서.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혜준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면서 이불을 끌어당겨 훽 뒤집어 썼다. 유진은 혜준의 투정기 가득한 말투를 들을 수 있는 이 순간을 즐겼다. 이혜준이 남에게 쉽게 보이지 않는 모습. 특별할 것도 없는 말이지만 그는 앞으로 며칠간 이 문장을 이 어조 그대로 혼자서 몇 번이고 되내일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내 사랑, 당신 발치에 있답니다. 모두 당신을 위한 거예요. 그대를 위해서 아껴왔어요.
“꽃 보러 가기로 했잖아요. 이쯤 되면 일어나야 되지 않겠어요? 그렇게 이른 시간도 아닌데. 시계 봐요.” 그는 머리맡에 놓여있는 혜준의 핸드폰을 집어서 그의 얼굴이 있던 자리에 들이밀었다. 혜준은 그제서야 이불을 슬쩍 치우고는 휴대폰을 받아들고 스크린을 톡톡 두들겼다. 시간을 확인하자 찌푸려진 얼굴이 펴진다. 유진은 쿡쿡 소리를 내서 웃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내 사랑, 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요. 그대를 본 이후론 말이예요. 난 왜 그런지 잘 알지요.
혜준은 끙하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그란 뒤통수의 머리카락이 엉망진창이다. 그리고 그가 예측했던 것처럼- 혜준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유진이 조금이나마 정리해두었던 머리카락들이 주인의 손길을 반기는 것마냥 또 제멋대로 흐트러진다. 혜준은 하품을 크게 하고서는, “나 먼저 씻을게요,” 하는 말과 함께 욕실로 향했다. 그의 일상에는 이렇게 작은 즐거움이 가득했다.
봄꽃도 한 철. 그가 새롭게 익혀둔 관용구다. 젊음도 한 때고 좋은 시절도 금방 끝이 난다는 뜻이라나. 분명 이혜준과의 삶은 봄꽃과도 같았다. 그렇지만 그는 한 철로 이 삶을 마무리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혜준이 내민 손을 잡으면서 평생을 생각했고, 그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8.
피아노는 어마무시한 가격의 장식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고모가 여전히 가까이 살았다면 혜준의 집에 들를 때마다 혜준의 등을 철썩철썩 때리면서 ‘내 이럴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어,’ 했을 것이다. 그러면 혜준은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겠지. ‘그래도 할부금은 다 갚았어.’
혜준과 아버지의 사진 곁에는 이제 유진과 유진의 어머니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어린 혜준과 아버지의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유진은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혜준은 그가 그 사진 속에서 무엇을 발견했을지가 궁금했다. 한참을 들여다 보고 나서 그가 한 말은 ‘이혜준은 그대로 컸네요,’ 였다. 그리고 그는 혜준의 눈치를 잔뜩 살피더니 ‘아버지랑, 많이 닮았어요.’ 하고 덧붙였다.
혜준은 그가 자신의 기분을 살펴준다는 것이 고마웠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웃는 얼굴이 특히 닮았다고들 하더라고요. 난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고모랑 산 세월이 더 긴데, 고모 얼굴이 나오는 게 아닐까?’ 하고 혜준이 답하자, 그는 피식 웃었다. ‘고모님은 모르겠는데, 처제랑은 닮았던데요. 화낼 때랑 짜증낼 때 표정이요.’
그는 거의 혜준의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어느 순간부터 혜준은 거의 매일 저녁 그의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매번 옷차림이 다른 것을 보면 그는 낮에 자신의 오피스텔에 들려 옷을 갈아입고 오는 것 같았다. 혜준은 이 관계에 있어서 앞으로 한 발짝을 더 내딛어 보기로 했다.
그가 서울에 볼 일이 있다는 주말에 혜준은 쓰지 않는 물건들을 정리했다. 서랍장을 한 칸 비웠고, 옷장에 빈 공간을 마련했다. 심지어는 책장까지도 한 칸을 비웠다. 괜히 버리지 못 하고 남겨두었던 고시생 시절의 노트들이 스프링이 제거된 채로 폐지박스에 들어갔다.
월요일에 혜준의 집으로 돌아온 유진은 아직 분리수거일까지는 한참 남았는데도 현관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종량제봉투와 가득 찬 폐지박스를 보고서 질문을 던지는 표정으로 한 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혜준이 ‘정리를 좀 했어요. 당신 물건을 좀 가져다 놔도 되게.’ 하고 답하자 유진은 신도 채 벗지 않은 채로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와 혜준을 끌어 안으려고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혜준은 신발부터 벗으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가 제일 먼저 가져온 것은 여분의 옷가지가 아니라 그 사진이었다. 혜준은 예상치 못 했던 물건이다. 그는 액자를 들고 한참을 서성였다. 피아노 앞. 책장. 다시 피아노 앞. 거기서도 또 왼쪽. 오른쪽. 다시 책장. 대체 뭐길래 저런 식으로 우회적으로 허락을 구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뭐, 도촬이라도 해서 뽑은 사진이야? 그럼 진짜 가만 안 둬. 이리 달라는 손짓에 그가 혜준의 손에 쥐어준 것은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린 유진과 그의 어머니의 사진이었다.
혜준은 한참 아무말도 하지 못 하다가 쌍꺼풀이 짙은 어린 아이의 뺨을 손가락으로 쓱쓱 쓰다듬었다. ‘아깝네요. 이때가 더 나은 거 같은데.’ 그리고 액자를 피아노 위에 올려놨다. 어린 유진은 어린 혜준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 어른이 된 두 사람이 두 개의 액자를 바라보면서 피아노 앞에 나란히 선 것처럼.
혜준은 예전만큼 피아노를 열성적으로 치지는 않았다. 학원 수업은 아예 유효기한이 여유롭게 찍힌 쿠폰제로 바꿨다. 학원에는 일이 너무 바빠서 시간이 잘 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댔다. 사실은 피아노 연습 이외에도 혜준이 달리 함께 시간을 보내고픈 사람이 생긴 탓이지만. 그래도 이런 성인 학생이 많았던 탓인지, 선생님은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하농이라도 가끔 쳐주세요. 손가락 안 굳게.’
역설적이게도, 혜준의 손가락이 굳지 않도록 한 것은 바로 혜준을 피아노 학원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곡들의 악보를 사 모았고, 혜준은 종종 유진의 신청곡을 쳐주곤 했다. 유진이 가져오는 악보들의 난이도는 혜준의 수준에 딱 맞았고, 그가 ‘한 곡 뽑아주시죠,’ 하고 연습 겸 연주 청을 넣는 타이밍은 귀신 같았다. 혜준은 그렇게 피아노 앞에 앉으면 즐거웠다. 자신이 요구하지 않아도 자연히 쏟아지는 관심과 노력에 마음이 녹았다. 이것은 사랑일 것이다.
9.
그의 귀가가 늦었다. 혜준이 퇴근을 할 때면 그는 보통 이미 혜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물게 혜준이 정시 퇴근을 하면 아직 텅 빈 아파트가 혜준을 맞이할 때도 있긴 했다. 그는 근처 마트에서 마감 할인 품목을 쓸어오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앞의 그 어느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혜준은 그가 왜 늦는지도 알고 있었다. 마리가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
[유진 한, 오늘 오퍼 받았다는 거 같던데]
[지금 공격적으로 성장 중인 헤지 펀드에서]
[구직 중이였어?]
퇴근길에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업무 시간 중에 확인하지 못 했던 메시지를 읽던 혜준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 읽은 것은 아닌지 다시 화면을 찬찬히 살폈다. 두 번, 세 번, 아무리 다시 읽어봐도 그가 처음에 읽은 그대로였다. 혜준은 마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약속이 있다고 말을 하긴 했다면서 혜준이 운을 뗐다. ‘근데 어디랑 만났대? 그건 얘길 안 하고 가더라고.’ 혜준은 애써 정말로 궁금하단듯이 물었다. ‘그걸 말 안 해줬어? MSDP. 미국에서 의약기업들 잡아먹으면서 덩치 불린 회사라던데. ’
“공격적으로 성장 중인.”
“잡아먹으면서.”
그 말인즉 또 다른 벌처 펀드에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뜻이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혜준은 마리를 놀래키지 않고 마리와의 통화를 마칠 수 있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전화로 업무를 처리하는 실력이 많이 나아진 모양이다. 진마리는 웬만해서는 잘 속지 않았으니까.
혜준은 운전석 문을 열고 차에 들어갔다. 차에 시동이 걸린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
혜준은 그들이 미래에 대해서 의논한 적이 있었나를 되짚어 봤다. 없다. 그렇지만 혜준은 그에게 “당신이 준비가 되었을 때, 나와 함께 하고 싶다면” 자신에게로 오라고 말하지 않았나. 유진이 자신에게 왔을 때, 혜준은 그가 그 말의 함의를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혜준이 지키고자 하는 선을 그 또한 암묵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지 않았던 것인가 보다.
그는 조금 늦는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예상 도착시간과 함께 자신이 깜짝 선물을 가져간다는 말도 덧붙였다. 오랜만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혜준은 그를 어떤 얼굴로 맞이해서 어떤 말을 해야 되는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절실했지만, 오늘만큼은 그가 자신에게 그런 여유를 허용해주고 있지 않았다.
1시간. 1시간 후면 그가 온다. 이혜준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가 가져온다는 깜짝 선물이란 또 뭐란 말인가. 바하마보다 그의 몸값을 높게 쳐주는 계약서? 그걸 축하하기 위한 값비싼 와인?
혜준은 현기증이 느껴졌다. 이혜준이 한유진에게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던가. 그에게 그럴 자격이 있었나. 혜준의 가장 오래된 상처가 벌어져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혜준의 아버지는 혜준을 저버렸다. 혜준은 아버지의 눈에서 삶에 대한 욕망이 사라져가는 것을 꽤 오랜 시간 동안 봐왔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 했지만, 무언가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가끔 반찬을 가지고 와서 집안일을 봐줬던 고모는 매번 술에 절어 잠들어 있는 아버지를 보곤 혜준에게 아빠가 오늘은 괜찮더냐고 물었다. 혜준은 늘 거짓으로 답했다. 혜준은 아버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했다.
혜준은 유진의 자신에 대한 사랑을 믿었다. 그것은 근래 혜준이 두 발을 딛고 있었던 땅이다. 그 토대에 균열이 가고 흔들리고 있다는 감각이 혜준을 지배하자, 혜준은 더 이상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과거의 자신은 무엇을 요구해야 할 지 몰랐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는 어린아이였다는 점은 이미 머릿속에서 씻은듯이 잊혀졌다. 대신에 공포와 불안감만이 엄습했다.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야 할 보호자에게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못 했는데, 그리고 그조차도 이혜준을 떠나길 선택했는데, 과연 이혜준에게 한유진에게 변화를 요구할 자격이 있을까. 그가 이에 응답할 의무가 있나.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혜준은 눈물을 닦으며 일어섰다. 그에게 물어야 한다. 말을 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을 말한단 말인가.
“내가 늦었죠. 서울에 좀 다녀오느라. 차가 많이 막히더라고요.”
그의 목소리는 밝았다. 그는 부산스럽게 양손에 가득 쥐고 있던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혜준이 입을 열었다.
“일자리 제안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머릿속이 백지 같았다. 이 말을 제일 먼저 하는 게 맞나?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점심은 소화가 된 지 오래일텐데 속이 울렁거렸다.
신발을 벗으려던 유진이 혜준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의 머리 위로 센서등의 불빛이 떨어졌다. 그는 놀란 표정이다. 혜준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머릿속에서도 정돈되지 않은 말을 줄줄이 이어갔다.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살라는 말을 하진 않을 거예요. 내가 그런- 나한테 그럴 자격은 없으니까요.”
현관의 센서등이 꺼졌다. 그의 얼굴은 어둠에 휩싸여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것은 반사된 거실의 불빛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혜준의 이러한 말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예요.”
혜준은 공을 그에게로 넘겼다. 선택은 네 몫이야. 부디 나를 고르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간청의 말 대신 이혜준이 내뱉은 말은 패배의 언어였다. 싸우지도 않고 패배한 자의 언어.
“만약 당신이 이별을 말한다면 나는- 그렇지만 내가 당신에게 어떤 삶을 살라고 강요할 순 없어요. 나는… 못 해요.”
“그게 지금 이혜준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인가요?”
혜준은 그가 이런 톤을 사용하는 것을 딱 한 번 들어봤다. 혜준이 환율을 조작해주길 거부했을 때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혜준은 그가 행사할 수 있는 물리적 폭력만큼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손을 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를 만나고 나서 수많은 부분에서 달라진 혜준의 세계를 산산조각낼 수 있었다. 그리고 혜준은 그 상처로부터 회복하는데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혜준은 그 가능성이 두려웠다.
그러나 혜준은 그에게 이런 마음을 전하지 못 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유진은 무언가 말을 하려는 거 같았지만, 그도 결국은 돌아섰다.
그가 가고 난 자리에는 다시 불이 들어온 센서등만이 덩그러니 켜져 있었다. 혜준은 현관 앞에 선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이혜준은 생애 최초로 스스로가 한심하고 비겁하게 느껴졌다. 울음이 터져나왔다. 혹시라도 닫힌 문 너머로까지 소리가 전달될까봐 혜준은 입을 틀어막고 애써 숨을 죽였다.
벌써부터 미칠듯이 후회가 됐다.
10.
한유진이 이혜준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는 것 한 가지를 꼽자면, 그의 연인이 절대로 비겁한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혜준의 한 발짝 뒤로 물러서겠다는 입장 표명에 피가 식었다. 도무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끓어오르는 감정 때문에 후회할 짓을 해버리기 전에, 그는 이혜준과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것을 선택했다.
용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유진은 앞서 가는 차량 행렬을 노려보면서 정신을 다른 곳에 돌리려고 애를 썼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열치열. 한국에 들어오면서 익혀둔 관용어구들이라도 외워보면 머리가 식을까 해서 되내여 봤으나, 역효과만 났다.
A F**king tit for tat? 그는 혜준과 이 게임을 이런 식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원했던 것은 이렇게- 서로가 거리두기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혜준에게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었다. 그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그 답례로 이혜준의 모든 것을 받고 싶었다. 아니. 지금 마음 같아서는 투명하게 보이기만 한다면 혜준의 마음의 가장 작은 조각 하나만이라도 좋았다.
앞서 가고 있는 차들의 후미등의 불빛이 그의 시야에서 벌겋게 번졌다. 그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서 대리운전을 불렀다. 이 정신으로는 사고를 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
그는 문을 열자마자 욕실로 직행했다. 찬물을 한참 뒤집어 쓰고 나니 머리가 맑아졌다. 혜준이 그에게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 한국은 과도하게 땅덩어리가 좁고 소문은 그에 비례해서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퍼졌다. 애초에 만나지도 말았어야 했나. 그도, 상대측 사람도 눈에 튀지 않을 곳에서 조용히 만나고 치울 수 있게 약속을 잘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가 그를 알아보았나 보다. 그리고 그게 제보라는 명목 하에 진마리 기자의 귀로 들어가고. 그 다음은 안 봐도 뻔했다.
혜준이 왜 자신의 삶에서 발을 빼려는 것 같은 말을 하고야 말았는지, 그 이유만큼은 그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신뢰가 가는, 아, 이 나이에도 이런 말을 써야 되나. 남자친구는 아닐테니까. 그리고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만일 그가 아무런 유혹을 느끼지 못 했다면 아예 약속조차 잡지 않았을 거란 것을 말이다. 굳이 세종에서 서울까지 다녀와야 할 정도로 번거로운 일이니까.
하지만 그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티나 바하마의 말대로 그는 객관적으로 바닥을 쳤다. 투자국 법정에 섰다. 여기까진 별로 특별한 일은 아니지. 그러나 그는 업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법망을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것에는 성공하지 못 했다. 그러지 않길 선택한 쪽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그런 그와 함께 일하고자 하는 이 회사가 대체 어떤 곳인지, 대체 무슨 일을 맡기고 싶은 것인지가 미칠듯이 궁금했다. 대체 어떤 새끼가 장난질이야, 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놀랍게도 생각보다 회사는 건실해 보였고, 그에게 내미는 조건도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유진이 이끌 프로젝트가 자리를 잡고 나면 한국에 본격적으로 지사를 낼 의향도 있다고 했다. 이는 그가 혜준의 곁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 제안을 거절했다. 한국 지사장 자리. 그것은 혜준의 곁을 영구적으로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란 의미지 그가 자리를 비울 일이 없어질 것이란 의미는 아니다. 뉴욕과 한국 사이를 오가던 시기를 떠올려 봤다. 이혜준이 채 제 손을 잡지도 않았을 때에도 그는 이혜준의 빈자리를 아쉬워하지 않았던가. 이제 그의 곁에 선다는 것의 단맛을 알아버린 이상, 상실감과 박탈감은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이혜준의 말을 빌리자면, “누군가가 잘못된 선택을 내릴 때 동조하는”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러지 않길 택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운 좋은 사람이었다. 이 결정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당장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은 이혜준이 마치 자신에게 그의 삶에 대하여 관여할 자격이 없다는 것처럼 굴었다는 점이다. 한유진은 이혜준에게 그 모든 권리를 기꺼이 넘겨준 지 오래다. 만일 이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하지 못 했다면 그것은 그의 과실이다. 혜준이 어떤 종류건 어떤 이유에서건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니,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당장이라도 다시 혜준을 찾아가서 소리치고 애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안 된다.
그렇지만 이혜준에게는 그를 이런 식으로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의무도 있지 않았던가? 이혜준은 그에게 속할 곳을 찾아준 것만이 아니라, 굳이 그를 찾아와 자신의 곁으로 올 것을 권유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그의 오피스텔에는 더 이상 그가 사랑하는 것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은 혜준의 작고 낡은 아파트에 모여있었으니까. 그렇게까지 그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그로 하여금 그 집구석에 있는 타일 하나까지도 애틋하게 여기도록 한 것은 이혜준이다.
유진은 혜준에게 이 두 가지 사실을 알릴 것이다. 혜준이 그를 버리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혜준이 잘못된 선택을 내릴 때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혜준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이니까.
***
딱 한 병 남겨뒀던 위스키를 진탕 마시고 겨우 잠이 들었을 때였다. 집요하게 울리는 벨소리에 그는 잠에서 깼다. 현관으로 다가가자 주먹으로 문을 두들기는 소리까지 들렸다. 현관 카메라에는 문 앞에 선 사람의 얼굴이 잡히지 않았다. 그 사람이 워낙에 문 앞에 바짝 붙어서서 정신없이 주먹질을 하고 있었으니까. 경비실 호출을 해야 되나 고민하는 사이에 그의 뇌가 번쩍 정신을 차리고는 이건 이혜준이라는 것을 알려왔다. 제대로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는 문을 열어젖혔다. 이혜준이 그에게로 왔다.
혜준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울고 온 것이 분명했다. 유진은 반사적으로 혜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혜준은 적정거리를 유지하라는 듯이 방어적인 자세로 오른손을 반쯤 들어보였다. 사랑하는 이의 거부가 상처를 주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이는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유진은 혜준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했다.
그는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혜준과 마주섰다.
“마음을 바꿨어요.”
그의 머리가 급하게 시동을 걸고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각종 시나리오를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제대로 연산을 마치기도 전에, 이혜준은 자신이 준비해 온 말을 이어갔다.
“내게 줘요. 날 위해서 살아줘요. 누군가에게 이런 요구를 해보는 건 처음이고- 그러니까. 나는. 우리 아빠한테도- 날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사람에게도, 이렇게 말을 해보지 못 했어요.”
그의 사고가 멈췄다. 복잡한 생각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혜준의 말을 이해했으니까.
“지금도 나는 너무 겁이 나요. 그렇지만, 그래서 더 분명하게 말할 수 밖에 없어요. 날 선택해요. 당신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말해줘요.”
“My life- ”
그는 목이 메었다. 그래서 목구멍에서 뛰쳐나오려고 아우성인 문장을 거기서 끊을 수 밖에 없었다. 술병을 기울이면서 생각했던 수많은 문장들은 어느새 머릿속에서 지워졌고 본능적인 답만이 튀어나왔다.
“-is in your hands.”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서 이혜준의 두 손을 잡았다. 혜준도 긴장을 했던 탓일까, 두 손은 뜨겁고 축축했다. 희고 가녀린 손은 이번엔 저항없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그는 경건한 마음으로 그 손끝에 입을 맞췄다. 이 입맞춤으로 당신에게 내 삶을 바치겠다는 것처럼. 혀에도 닿는 짠맛이 달게만 느껴졌다. 그의 시선은 혜준의 눈을 떠나지 않았고, 혜준도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혜준도 그의 눈에서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나의 삶은 당신의 것이라는 굳은 맹세를.
11.
“오트밀이나 크림?”
뜬금없는 소리였다. 적어도 혜준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그들은 호텔 침대에 누워서 팔자 좋게 룸서비스로 시킬 아침 식사 메뉴를 정하는 게 아니라 계절이 바뀌는 것을 맞아 혜준의 옷장을 정리하는 중이었으니까.
“먹을 거요? 난 둘 다 별론데. 오트밀을 대체 무슨 맛으로 먹어요? 으.”
혜준은 지난 출장 때 아침 식사로 시도해봤던 오트밀의 어정쩡한 맛과 점도를 생각하고 혓바닥을 쑥 내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이혜준이 좋아하고 잘 어울리는 색이요. 이런 색이 많길래. 좀, 회색빛이 도는 베이지? 아니면 노란색이 섞인 베이지?”
그런 색 옷이 많긴 하지. 대한민국 직장인의 출근용 옷은 튀지 않는 저채도거나 무채색이 대부분이니까. 혜준은 잠시 고민했다. 둘 중에 고르자면 고를 순 있지만, 그게 내가 좋아하는 색은 아닌데.
“둘 다 괜찮아요. 그치만 좀 더 마음에 드는 건 크림색.”
“앞으로 꼭 선물하고 싶은 게 생겼을 때, 참고할게요.”
유진의 손은 부지런히 솜씨좋게 혜준의 여름옷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것도 색깔별로 분류해가면서. 지금 저 머릿속에선 엑셀 차트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옷의 종류와 사이즈와 색깔별 수량까지 기록되어 있는. 혜준은 이런 껄끄러운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괜히 머리만 아프지.
유진이 도와주겠다고 한 덕에 큰맘 먹고 서랍장을 통째로 비웠다. 계절별로 옷가지를 대충 구분한 후에 혜준이 버릴 옷을 골라내고 있으면 유진은 혜준이 남겨두기로 결정한 옷들을 개켰다. 조용히 함께 집안일을 하고 있자니 혜준은 뜬금없이 수종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던졌던 말이 생각났다. 넌 왜 가만히 있으려고를 하질 않니.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유진은 달랐다. 혜준과 유진은 각자 나름의 리듬을 가지고도 곧잘 함께 움직였다. 가끔 혜준이 빠른 박자로 스타카토를 치고 있으면 유진은 느긋하게 반주를 넣어줬고, 역으로 유진이 질주할 때 혜준은 천천히 엇박자로 추임새를 넣어줬다. 그 어느 순간에도, 유진은 혜준의 속도에 대해서 타박하지 않았다. 혜준을 조급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들은 조화를 이뤘고, 혜준은 행복했다.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은 노란색이예요.”
“접수했어요. 두고 봐요. 내가 세상에서 이혜준이랑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란색을 찾아낼 거니까.”
“아무렴요. 어련하시겠어요.”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