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nd of Sognando
Written By 응자
1.
혜준은 항상 꿈을 꾸었다. 꿈은 이렇게 시작했다. 꿈속에서 숨을 쉬는 생명체는 혜준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곳. 제 호흡만이 귓전에 울리는 걸 듣고 혼자라는 걸 눈치챈다. 아무도 없어요? 제발, 제 말이 들리면 대답해 주세요. 살려주세요. 아니, 같이 살아가요. 저 혼자가 아니라고 한마디만 해주세요.
혜준이 울먹거리며 나아가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자 달래듯이 대답이 돌아온다. 여기서 뭐 해요? 혜준은 무릎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춘다. 그토록 기다리던 타인의 목소리. 어디 있어요? 혜준은 간절하게 묻는다. 천천히 와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오라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혜준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뜀박질을 시작한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혜준은 터트리듯 눈을 떴다. 꿈이면서 꿈이 아니잖아. 현실로 돌아오니 베갯잇이 축축했다. 무슨 꿈이었더라. 언제나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넘실거리는 감정의 찌꺼기만이 콧잔등을 따갑게 했다. 혜준은 몸을 일으켜 뒷좌석에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여정을 떠났던 그 날처럼 일어서서 M-115에 시동을 걸었다.
노쇠한 노인의 기침 소리 같은 엔진이 달달 거리며 멈췄다. 혜준은 운전석에서 내려 황망한 땅을 밟았다. 자꾸 반대로 부는 모래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래밭을 발로 휘저으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여기 어디쯤인데. 다리가 그리는 타원형의 크기가 점점 커질 때쯤, 혜준의 발끝에 소리가 파동칠 만큼 둔탁한 물체가 걸렸다. 아치형의 고리였다. 혜준은 무릎을 꿇고 손잡이를 기준으로 모래를 털어내니 맨홀 뚜껑 하나가 숨통을 텄다. 혜준은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이음새가 비명을 내질렀다. 벙커의 입구는 오래 왕래가 없었던 걸 삐걱거리며 말해주었다. 혜준은 다리를 아래로 뻗어 사다리를 잡아 벙커 안으로 향했다. 제발 살아있어라. 혜준은 사다리를 하나씩 붙들 때마다 형체도 없는 것에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기도의 회답은 체념에 가까웠다. 벙커 안 코너를 돌자마자 가지런히 간이침대에 누운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썩어 문드러진 곳도, 부패된 곳도 없었지만 혜준은 시체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방부제' 먹은 거겠지. 알약 형태의 방부제. 말 그대로 죽은 육체에도 시간이 흐르는 걸 허락하지 않은 인간의 발명품이었다. 혜준은 정돈된 책상에 놓인 종이 두 장을 집어 들었다. 유서였다.
이 편지를 읽고 계신 건 저를 발견했다는 뜻이겠지요. 폐를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 방부제를 먹고 잠에 들었습니다. 깨워도 일어나지 않을 거지만요. 장례는 필요 없습니다. 저의 죽음에 어떤 것도 부여하지 마셨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저를 발견할 날이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일단 우선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당신을 두고 겁쟁이처럼 달아나서 죄송해요. 너무 외로워서 도망쳤다고 하는 게 맞겠죠. 나 혼자 여기에 살아남았다고 여겼는데 어느 날 나만 버려진 게 아닐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근데 그게 사실이 되고 나니 저 스스로 인정하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었습니다. 가족, 친구 모두가 에덴으로 떠난다고 했을 때도 이렇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사실, 에덴이 된 가족과 친구들이 죽어 나가는데도 생존했음에 저는 안도했습니다. 내 선택이 맞았구나, 나는 여기에 살아있구나. 무섭도록 이기적이죠. 그래서 저는 끝까지 이기적이려고 합니다.
이 유서를 읽은 당신이 올 때까지 좀 더 기다렸다면 만날 수 있었을까요? 유서가 아닌, 마주 보고 대화할 수 있는 날이 왔을까요? 감히 당신에게 행운이 따라 달라고 소망하겠습니다.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
제 마지막 부탁은 저를 용서해달라는 것도, 인류의 미래가 되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부디 살아만 주세요.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유서가 혜준의 손아귀에서 구겨졌다. 당신이 마지막이었단 말이에요. 소리도 없이 혜준의 어깨가 잘게 진동했다. 좀 더 일찍 왔더라면, 하루라도 빨리 이 사람을 찾아냈더라면. 그러나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이미 일어난 일을 거슬러 타임라인을 돌이키는 건 신만이 가능했다. 혜준은 구원이 아니라 비난하기 위해 신을 찾았다. 모든 건 신이 원하는 대로 된 거야. 없던 신을 만들어 내 누구라도 책망하지 않으면 혜준은 세상처럼 무너져내려 자국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혜준은 배가 볼록해질 때까지 공기를 들이마셨다. 날숨에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심호흡했다. 혹시 몰라 생존자와 나눠 먹기 위해 이것저것 챙겨온 가방은 여전했다. 죽으면서까지 다정하고도 이기적인 이 사람은 혜준이 가져가기 좋게 남은 통조림 몇 개와 여분의 비상약까지 찬장에 모아두었다. 부디 살아달라는 부탁은 허울이 아니었다. 혜준은 가방의 지퍼가 간신히 잠길 정도로 그것들을 쑤셔 넣으며 굳게 짐작했다.
자신이 어쩌면 최후의 인류일지도 모른다고.
The End of Sognando
2.
전쟁도, 학살도 아니다. 인류가 오랫동안 싸워왔던 거창한 곡절이 아니었다. 웃기게도 세상이 멸망으로 치달은 결정적인 요소는 초라한 믿음 하나였다. 그 맹신은 기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에덴'이 처음 출시되었을 때 꼬리표처럼 광고에 송출되었던 카피 하나.
영원한 삶, 영위한 당신.
'에덴'이 되는 건 간단했다. 자신이 원하는 외모와 성격을 커스텀 한 개조 신체 즉, '에덴'에 자아를 그대로 옮기는 재건 수술이 끝나면 감쪽같이 '나'는 사라졌으면서도, 새로운 '나' 자신이 태어났다. 인간은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은 완벽한 몸으로 다시 환생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영원한 삶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영원을 영원히 유지할 수 있다고 자만했다. 선악과를 먹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에 복종했다.
에덴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며, 혜준은 사이비 종교 신자들의 눈과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국이니 신이니, 이름뿐인 존재들의 가면을 눌러쓰고 실재하는 교주를 따르게 만드는 사이비와 뭐가 다르지. '에덴'을 제조하고 자본으로 배를 불리는 기업과 사이비의 모습은 소름 끼치도록 비슷했다. 자, 봐라. 신은 네 앞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내가 네 앞에 실재한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신도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이 땅에 소모되는 삶을 사는 이상, 영원하다는 건 닿을 수 없는 거야. 살아서 영원을 누린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그래서 영원인 건데.
혜준은 날뛰는 세상의 몸부림을 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제정신을 잡기 위해 강박적으로 말들을 꼭꼭 씹어 삼켰다. 전체 인류의 80%가 재건 수술을 받을 무렵, 혜준은 인간으로 남아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언제나 이상적인 기대는 비이성적인 결과를 낳았다. 역사는 예외의 산물이었다. 시대의 새로운 막이 열릴 거라 신봉하던 98%의 인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창조한 세계를 스스로 부수기 시작했다. 에덴에 입력된 자아와 기존의 자아가 충돌하여 오류가 일어났다. 예상치 못한 변수에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해결책을 찾기에 너무 빨리 흘러갔다.
마치 영원이라는 바이러스가 퍼진 것처럼, 서로를 물어뜯어 기능을 상실하게 했고, 제 코어를 꺼내어 자살하는 에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분명 자살할 수 없도록 설계되었을 텐데, 영원을 숭배하던 에덴들은 부득불 죽음을 택했다. 신인류의 불씨는 빠르게 꺼졌다.
일주일. 50층 건물에서 몸을 내던져도 코어가 부서지지 않자, 박살 난 사지를 끌어 제 코어를 산산조각 냈던 에덴을 시작으로 그들이 일궈놓은 세계가 멸망하기까지 고작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에덴으로 떠나자고 제안하던 TV도, 병 든 자들이 없던 거리에도 정적이 파도쳤다. 그러다 정적의 파도가 세상이라는 방파제를 때릴 때쯤, 에덴들의 뜯겨나간 살점과 조각난 몇 점의 부품이 떠밀려왔다.
일주일이 지나고 혜준은 자취방 현관문을 열어 고요의 틈을 갈랐다. 빈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선 혜준은 턱을 쳐들 수 밖에 없었다. 한 달 전 재건 수술을 받은 옆집 아주머니가 공허한 눈을 하고 숨을 멈춘 채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집에서 차를 나눠마시고 반찬을 주고받았던 아주머니. 오랜 노동으로 허리가 불편하시던 아주머니는 곧 새 몸을 얻게 된다며 좋아했다. 곧 예쁜 모습으로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낯선 외형이었지만 딸이 선물해줬다며 자랑했던 아주머니의 목걸이가 부서진 에덴 목에 걸려있었다. 혜준은 무지근한 다리를 달달 떨며 잔해를 넘어섰다. 이내 혜준의 눈에서 불거져 하나로 뭉쳐지는 눈물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고개를 땅으로 꺼트렸다. 세상이 눈부셔 견딜 수 없는 갓난아이처럼 혜준은 복도에 앉아 목청 놓아 울었다.
마트의 자동문이 에덴의 잔해를 인식하고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혜준은 더 조각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잔해를 들어 한 쪽에 옮겨 두었다. 닫힌 자동문이 인간인 혜준을 인식하지 못해 열리지 않았다. 나뒹구는 에덴의 왼손을 주워 센서 앞에서 흔들자 문이 열렸다.
마트 안에서 빈 가방에 필요한 약과 음식을 욱여넣으며 공간을 채웠다. 재건 수술을 받고 에덴이 된 사람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육체를 가진 사람들은 살아남았겠지. 혜준은 필사적으로 붕괴한 세상에서 목적을 찾았다. 그렇다면 가방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혜준은 카트를 끌고 와 생필품을 쓸어 담으며 생각했다. 신의 영역에 발을 들인 형벌이구나. 어떤 종교도 믿지 않던 혜준은 그제야 신이라는 존재를 의식했다.
평범한 공무원이던 혜준은 2%의 생존자들을 찾아 길을 떠난 건 정확히 2,238일 전 일이었다.
2,239일 째 되던 날, 혜준은 소수점이 찍힌 퍼센트의 숫자 주인은 바로 자신인 걸 깨달았다.
혜준은 벙커 안에서 차갑게 식은 시체에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가 목까지 내려주었다. 곧 숨을 쉴 것 같아서, 답답하지 않도록. 혜준은 핏기가 가신 민얼굴을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거기서는 외롭지 마세요.
책상 위에는 유서 말고도 지류가 하나 더 있었다. 수없이 접었다 펴 낡은 지도에는 빨간 동그라미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얼추 보아하니 여기서 꼬박 삼 일을 달려야 간신히 도착할 수 있는 먼 거리였다. 혜준은 그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지도를 챙겼다. 마지막으로 갈 곳이 생겼다.
혜준은 사다리를 올랐다. 자꾸 벙커 안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을 이기며 간신히 지상으로 몸을 뺐다. 가벼워졌으면 했던 가방은 곱절로 두둑해졌다. 애꿎은 가방을 조수석에 던져두고, 지도에 표시된 장소의 좌표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앞 유리에 경로가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좌측 하단에는 '81시간 50분 소요'라는 안내가 반짝였다. 혜준은 화살표를 따라 핸들을 틀었다.
3.
짬을 내어 잠을 자고, 먹을 때 말곤 입을 열지 않으면서 혜준은 닷새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길 위에서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M-115는 기침해댔다. 한 때 우주 비행까지 가능한 자동차라며 획기적인 발명품이었음에도 이젠 생산을 중단한 구형 제품이 되었다. 오래 잘 버텨주며 생존자들을 찾는 여정에 함께 해준 M-115가 기특했다. 비록 목표는 단 한 번도 달성하지 못했지만.
도착한 곳은 숲속 안에 있는 한 컨테이너였다. 우주에서 숲 한가운데로 똑 떨어진 별처럼 연록에 둘러싸인 노란 컨테이너는 꽤 이질적이었다. 혜준은 가방과 생활용품 꾸러미를 먼저 챙긴 뒤, M-115에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트렁크에서 커버를 꺼내 씌웠다. 이제 너도 편히 쉬어. 혜준은 누군가를 반겼던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다못해 고철 덩어리에도 작별을 고해야 했다. 습관이 된 이별은 딱지도 앉지 않고 곪아 인사를 건넬 때마다 쓰라렸다.
컨테이너의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이 살았다고 하기에는 건조한 살림살이들이 널려있었다. 그러나 꾸준히 누군가 드나들었던 것처럼 곳곳에 인적이 고개를 내밀었다. 서류 뭉치들, 흰 가운 몇 벌, 그리고 한 연구원이 버리고 간 ID 카드. 사면을 둘러보던 혜준은 지하로 나 있는 계단을 발견했다.
망설이지 않고 잠수하듯 깊은 곳까지 발을 굴리며 내려가니 또 하나의 문이 혜준을 맞이했다. 굳게 잠겨있는 문을 열기 위해 출입증이 필요해 보였다. 혜준은 뭐든지 챙겨두는 버릇이 생겨 어느새 제 손에 들린 ID 카드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걸쳤다. 손잡이 옆에 난 홈에 카드를 긁자 삑, 하는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스위치를 찾아 조명을 켜니 지상보다 훨씬 광활한 공간이 펼쳐졌다. 노란 컨테이너는 빙산의 일각이었고, 수면 아래에는 부피가 훨씬 큰 연구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연구원들이 지하에서 먹고 자고 생활한 동선을 따라 뒤를 밟았다. 수면실은 물론 화장실과 탕비실도 구비되어 있었다. 혜준은 먼지가 낀 찬기에도 평온함을 느꼈다. 쓰레기와 바닥에 흩친 종이들을 정리하며 혜준은 차근차근 이곳에 머물 준비를 했다.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를 '거슬린다'라고 인지한 건 혜준이 연구실에 도착한 지 시침이 거의 한 바퀴를 돌았을 때였다. 기계를 관리하는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 거지. 혜준은 설마, 하는 커다란 기대와 약간의 두려움으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신경을 가까이했다. 가장 큰 연구실에서 들리는 기계음은 일정했고 다망했다. 메인 연구실에 ID 카드를 긁어 열린 문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헤아리기도 전에 지칠 만큼 많은 컴퓨터와 모니터가 즐비했고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들의 선이 이리저리 엉켜 있었다. 무질서하게 꼬인 선들을 따라가 보니 거대한 수조에 연결되어 있었다. 혜준은 발걸음을 옮기며 어떤 것도 건드리지 않도록 몸을 사렸다. 터치스크린과 용도를 알 수 없는 키보드가 빼곡하게 들어찬 패널이 있었다. 패널 위에 삐딱하게 놓인 문서를 반사적으로 펴 맨눈으로 읽어내렸다. 요즘도 종이를 사용하는 곳이 있네. 실험체의 기본 정보와 관찰하고 기록한 목차들, 누군가의 실험 일지였다.
전문 과학 용어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익숙한 단어들은 금세 혜준의 시야에 들어찼다. 에덴, 남성, 초기 실험체, 불안정한 감정, 빠른 성장 …. 그리고 실패. 첫 실험체의 실패를 기반으로 상충하는 것들을 수정하고, 오류의 범위를 좁히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문서를 끝까지 넘겨 내용을 꼼꼼히 살핀 혜준은 마지막 장이 찢겨 나가면서 남긴 종이 쪼가리를 발견했다. 슬쩍 손으로 훑고 눈을 굴려 패널에서 무언가 찾았다. 이건가, 하고 레버를 올리자 거대한 수조에 불이 들어오고 파란 보존액에 담긴 한 사내의 몸이 드러났다. 태아처럼 몸을 안쪽으로 말고 호흡기를 달아 간신히 목숨을 유지했다. 일정했던 기계음의 정체는 그의 숨소리였다.
그러니까 단어를 조합해보면 장황한 문장이 만들어졌다. 수조에 담긴 이 남자는 '에덴'의 초기 모델, 지금은 자멸해버린 최초의 에덴이다. 최초의 신인류. 비극의 아담.
두꺼운 수조의 유리에는 실험이 시작된 날과 알파벳이 적혀있었다. 실험 명, E-GENE…. 뒤에는 지워져 완벽하게 단어를 읽을 수 없었다. 수조에 가까이 다가간 혜준은 신중하고 부드럽게 유리의 표면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그러자 E-GENE은 꾸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크게 한 번 움찔거렸다. 흠칫 놀란 혜준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곧이어 그가 왜 '실패'라는 도장이 찍혔는지, 혜준은 납득할 수 있었다.
"죽여주세요."
아담의 첫 울음소리가 서글펐다.
[E-GENE/ERROR/ NEW PROJECT START. . . ]
4.
"그럼 왜 깨웠어요."
싸가지 무슨 일이지. 혜준은 그를 죽일 수 없다고 받아넘기자 돌아온 그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혜준은 제 그림자에 몸을 숨겨 따라다니는 죽음에 일조할 수 없었다. 죽음이라면 지겨웠다. 그의 호흡기를 떼어내 죽게 두면 살인을 저지른 거나 마찬가지인데 어찌 망설이지도 않고 흔쾌히 숨통을 끊어주겠노라, 응할 수 있겠는가. 혜준은 그의 자살 계획에 가담할 만큼 자비롭지도 않았을뿐더러 AI와 삶과 죽음 사이의 철학을 논할 지식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왜 죽고 싶은데요?"
"자살하는 방법을 몰라서요."
레버 옆 빨간 버튼을 누르면 호흡기가 완전히 제거되거든요. 그는 친절하게 혜준의 손에 칼을 쥐여주며 살인하는 방법까지 가르쳐주었다.
잔인한 말을 안부처럼 건네며 그의 입이나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분명 그의 성격은 레시피처럼 누군가가 조악하게 짜깁기 해놓은 특성 중 하나일 텐데도 애처로움이 달라붙은 어조가 혜준을 흔들었다. '자살할 수 없'도록 프로그래밍 된 AI이면서, 왜 저렇게 필사적인 거야. 이 수조 안에서 외로움에 진짜 갉아 먹히고 있었던 것처럼. 혜준은 진짜 인간이라도 되는 듯 감정을 담아 자신에게 호소하는 E-GENE이 가증스러웠다.
죽고 싶었으면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지. 너만 없었으면 옆집 아주머니는 돌아가시지 않았고, 집 앞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계속 읽을 수도 있었어.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혜준은 손가락질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건 없다. 혜준은 금세 화살촉 같은 비난을 거뒀다.
"죄책감 들까 봐 그래요? 그럴 필요 없어요. 제 자아는 이 육체에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냥 스피커를 꺼버린다고 생각하세요. 저를 족쇄에서 풀어준다고…."
"지랄하지 마요."
혜준의 입 밖으로 비속어가 거름망도 없이 쏟아졌다. 나는 살인자가 될 생각 없어요. 절대로. 혜준은 AI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음절에 꾹꾹 힘을 주었다.
혜준은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제 특성을 성격으로 착각하고 있는 인공지능이 죽음이라는 걸 정말 알고 있는 걸까. 정말 만약에 말이예요.
"만약에 제가 이 스피커를 끄면, 지금 말하고 있는 당신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기나 해요?"
혜준은 딱딱하게 굳었던 음을 조금 풀어내어 물었다. 침묵이 지나간 자리에는 시간이 느리게 걸었다. E-GENE은 호흡기를 문 입을 움직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마 그의 머리에 연결된 선들이 뇌파를 해독하여 내보내는 것 같았다.
자유로워지겠죠.
혹은 영원히 잠들 거나. 사실 저도 잘 몰라요. 그래서 저도 이것저것 시도하는 중이에요.
죽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하는 중이라. 짜증 날 정도로 슬픈 구절이었다. 침묵을 끊어내고 혜준에게 닿은 회답은 꼬여있던 회로를 더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혜준은 지끈거리는 골을 붙잡았다. 내일 다시 얘기해요. 저를 내일까지 살려두려고요? 네. 내일도, 내일모레도. 계속 살려둘 생각이에요. 저는 당신을 죽일 생각 없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봐요. 나 말고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혜준은 메인 연구실을 나서면서 불을 껐다. 파랗게 빛을 내는 수조 때문에 연구실 안은 완전히 어둠에 잠기지 않았다. 푸른 빛 한가운데에 있는 E-GENE은 심해에 갇힌 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했다. 헤엄치지도 못하면서 바다를 엄마 뱃속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그런 생명체. 결국 혜준은 스위치를 위로 올려 형광등을 밝혔다. 저 밝으면 잠 못 자요. 그는 보존액 안에서 한평생을 보내 눈을 떠보지도 못했으면서 마치 잠들 줄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 내일 와서 꺼줄게요.
혜준은 메인 연구실을 나서면서 오랜만에 정말 사람과 대화한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명명하는 것을 포기했던 묵은 감정이 조금씩 해소됨을 느끼며 혜준은 뇌까렸다.
프로그래밍 한 번 개같이 해놨네.
혜준은 이따금 메인 연구실에서 밥을 먹었다. 통조림 하나, 포크를 들고 혜준이 메인 연구실로 들어가면 그는 똑같은 질문을 했다. 어때요,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아니요. 그다음 날에도, 오늘은요? 아니요. 오늘…. 아니요.
E-GENE은 혜준의 빈틈을 찾아 집요하게 굴었지만 견고한 혜준에게 틈이란 없었다. E-GENE은 태어난 이래, 뜻대로 되지 않은 것도 있구나, 포기하는 방법을 배웠다.
밥 먹을 시간이 되자 혜준은 가방에서 통조림을 꺼내 메인 연구실로 향했다. 이제 혜준에게 밥을 먹는다는 행위는 어느 순간 영양분을 공급하는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깨작깨작, 혜준이 연구실에서 여덟 번째 통조림을 까 포크로 뒤적였다.
E-GENE은 그런 혜준을 가만히 지켜봤다. 투명하게 맑은 낯빛에 흑갈색의 눈동자. 곧 죽을 것 같으면서 꾸역꾸역 삶을 이어나가는 가여운 아집. 그는 승낙받지 못할 부탁 대신 결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맛있어요?"
"…."
"맛없구나."
"그저 그래요."
E-GENE이 무심코 던진 질문에 무뎌진 맛이 혜준의 혀끝을 섬세하게 두드렸다. 그는 원하는 답이 정해져 있는 부탁 외에 해본 적이 없었기에 물음표로 끝나는 문장을 고민하고 솎아냈다.
"나 지금 되게 통조림 같다, 그죠?"
E-GENE이 혜준의 앞에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듯 말했다. 드디어 내가 외로움에 미쳐가고 있나 보다. 혜준의 눈앞에 E-GENE의 환영이 떠다녔다. 분명 상상해본 적도 없는 것인데 제멋대로 혜준에게 다가왔다. 홀로그램 같던 허깨비는 무서울 만큼 생기 넘쳤고 맥박이 잡힐 정도로 선명했다. 혜준은 애써 외면하며 포크로 통조림 내용물을 찔러보다가 둥실 떠오르면 다시 찌르고를 되풀이했다.
"유진."
뒤이어 혜준은 보존액에 잠긴 그의 몸체를 바라보며 낯설지만 어색하지 않은 이름을 생각해냈다. 죽고 싶어도 이름은 있어야지. 비가시적인 것도 이름을 가지면 형체를 가질 수 있다는, 혜준의 오랜 신념 같은 것이었다.
통조림은 이름이 없어요. 그냥 참치 통조림, 황도 통조림같이 분류되어 있을 뿐이지. 당신은 이제 유진이에요. 그게 당신 이름이에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통조림 아니에요.
혜준은 적어도 자신이 여기에 머물고 있을 때만큼은 그를 뻣뻣한 실험 명으로 부르고 싶지 않았다. 유진…. 듣기 좋아요. 유진. 유진이라. 유진은 소중한 제 이름을 잊어버릴까,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가 태어나서 처음 가져보는 이름. 세상에 만들어 놓고 이름 하나 붙여주지 않았다니. 연구원들의 무책임함에 떠 남겨진 유진이 안쓰러웠다. 유진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저도 통조림이 아니니까 이름이 있어요. 이혜준. 혜준이라고 불러요. 혜준은 시선을 통조림에 담갔다. 듣기 좋은 유진의 목소리가 메인 연구실을 반사판 삼아 퍼져나갔다. 혜준, 혜준, 이혜준…. 빠르게 외던 유진의 목소리에 맞춰 균일하던 기계가 평소보다 더 빠른 템포로 운동했다.
5.
무엇에 쫓겨 달아난 건지, 아님 피치 못 할 사정으로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난 건지 연구실에는 연구원들이 두고 간 물품들이 꽤 많았다. 새것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세월을 머금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가 전부인 방. 4인실이던 다른 방에 비해 개인적인 공간이 보장된 이곳은 아마 실험을 총괄하던 연구원의 방이었겠지, 혜준은 어림짐작했다. 시간순으로 나열된 일지들, 백 년도 전에 단종된 아날로그 녹음기, 그리고 소매가 헤진 가운을 입은 중년 여성과 휠체어에 앉은 남성이 함께 담긴 사진 액자. 이 방의 주인은 아마 깔끔하고 낭만적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옛것을 사랑했던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수직을 그리며 나날이 발전하던 기술을 다루면서, 대대적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문서를 여전히 종이로 기록하고, 사진을 인화하여 액자에 꽂아 둔 연구원이 몇이나 될까.
혜준은 파일을 뒤적이다 바닥으로 팔랑, 하고 바닥에 종이 한 장이 떨어져 나왔다. 원래 있었던 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 본 내용에서 찢겨 아무렇게 꽂힌 종이의 울퉁불퉁한 곳을 손끝으로 쓸다가 유진의 실험일지를 떠올렸다. 마지막 장의 부재. 혜준은 신경을 세워 내용을 읽었다.
유진의 전체 실험 명은 'E-GENERATION'. 놀랍게도 유진은 만들어진 게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의 세포에서 자랐다. 인간의 DNA 없이 새 것인 양 제2의 인류를 만들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불치병으로 사망한 남성의 DNA를 기증받아 지금의 유진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표피 기증자의 프로필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구석에는 알 수 없는 숫자가 휘날렸다.
37404535.52
전화번호인가. 실없는 생각을 흘리고 시선을 아래로 점점 내려갔다. 그리고 눈에 띄는 '폐기'라는 단어. 에덴의 전반적인 기술과 구성 패턴 모두 유진의 것이지만, 폐기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폐기되지 않고 지금까지 수조에 숨이 붙어있다.
혜준은 액자 속 남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혜준은 표피 세포 기증자와 액자 안 말쑥한 남성의 얼굴이 닮은 걸 눈치챘다. 동시에 수조 안 유진의 얼굴이기도 했다.
연구원의 녹음기에서 튀어나온 삼각형 모양 버튼을 누르니 마지막으로 재생된 곳부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들, 노래 한 곡 뽑아봐. 엄마가 좋아하는 거로. 싫어, 부끄러워. 엄마 앞인데 뭐가 부끄럽냐. 병원이잖아. 우리 아들, 튕기지 말고. 응? 한 곡만 시원하게 불러줘.
그리고 유진과 똑같은 목소리. 혜준은 제목도 모르는 노래를 감상했다. 노래를 마치기도 전에 달칵, 소리를 내며 부자연스럽게 다음 녹음으로 넘어갔다.
아들. 미안, 하, 다. 엄마가, 미안해.
녹음은 여기서 끝났다. 노래를 잘하던 연구원의 아들은 불치병으로 사망. 연구원은 죽은 아들의 표피 세포를 받아 그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에덴의 발판으로 이용되고 종국에 폐기 조치 명령이 떨어진 최초의 인류.
누군가의 기구한 삶을 압축하여 엿보던 혜준은 한동안 방을 떠날 수 없었다. 일부가 전체가 되어버린 유진을 떠올리며 혜준은 싱거운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 오늘은.
"여기서 잘래요."
혜준은 메인 연구실 맨 뒤에 있는 소파에 이불과 함께 몸을 뉘었다. 켜두었던 형광등의 스위치를 내렸다. 왜 오늘은 불 꺼요? 불 켜놓으면 잠 못 잔다면서요. 사실 잠 든 적 없어요. 알아요.
혜준은 유진의 호흡 위로 제 호흡을 겹쳐보았다. 이렇게도 부단히 살아있다. 리듬을 같이 했다가, 엇박자로 공백을 채웠다가, 크게 머금었다가 눈을 감고 제 안에 고이게 했다가. 혜준은 마음껏 유진과 심해를 유영했다. 안온함에 잠이 오지 않았다. 유진, 자요? 지금 저 놀리는 거죠?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전생이 있다면 어떤 모습이 되고 싶어요?"
"전생?"
"지금의 유진이 다시 태어난 거라고 가정한다면, 이 이전의 삶은 어땠을 거 같냐고 묻는 거예요."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아니, 유진은 기억 못 하는 것뿐이에요. 혜준은 입안에서 외쳤다. 혜준이 몸을 틀어 유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혜준은 집에 있던 가정 AI에게도, 심지어 가족에게도 부탁하지 않았던 걸 유진에게 청했다.
"자장가 불러주세요."
"음, 2030년대 노래 좋아해요? 요즘 저는 그런 고전 가요도 좋더라고요. 좋아한다면 틀어줄…."
"아니요. 유진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줘요."
"어떻게 노래하는지 몰라요."
"유진은 알아요."
완전 억지. 유진은 볼멘소리를 툭 팽개치더니 이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혜준은 아날로그 녹음기의 버튼을 눌러 그의 목소리를 기록했다. 유진의 노래를 간직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수단이었다. 이미 있는 노래인지 무작위로 허밍 하는 건지 몰랐지만, 그 선율은 어딘가를 건드렸다 감싸주고 혼자 두지 않을 것 같은 하나의 우주였다.
혜준은 오랜만에 꿈이 찾아오지 않은 잠을 청했다.
6.
혜준의 어느 하루는 수조를 자전하는 위성처럼 흘렀다. 아침에는 햇살이 그리워서, 점심에는 책을 읽다가 궁금한 게 생겨서, 저녁에는 통조림의 맛이 달라져서, 그러다 새벽에는 바다가 보고 싶어서 메인 연구실에 발을 디뎠다.
밤에 유난히 싱글 침대가 먹먹해질 때면 혜준은 어김없이 이불을 들고 메인 연구실을 찾아갔다. 그리고 유진이 단잠을 잘 수 있게 불을 껐다. 혜준은 잠들기 직전까지 바보 같은 말을 유진에게 흩뿌리곤 했다.
유진도 꿈을 꾸나요? 그럼요. 거짓말. 진짠데. 그럼 이야기해 주세요. 기억… 안나요. 저랑 똑같네요. 꿈을 꾸는데 이상하게 눈을 뜨면 기억이 안 나요. 유진도 그래요? 네. 저도 그래요.
공상하고 잠을 청하는 동안, 그게 일순간 현실이 되었다가 숨을 터지듯 뱉으면 실재하는 곳에 기어코 눈을 뜨는 것. 꿈을 꿀 줄 알면 진짜 인간 아닌가. 경험을 바탕으로 꿈을 꾸는 AI라니, 들어본 적도 없다. 애초에 꿈을 꾸는 AI를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 개조된 신체에 입력된 AI를 어떻게 사람이 아니라고 정의할 수 있어? 정말 사람 같아. 혜준은 윗니로 아랫입술을 꾹꾹 누르며 다시 한번 되짚었다.
프로그래밍 정말… 잔인하리만치 개 같다.
"…실은 여기 죽으려고 왔어요."
혜준의 나지막한 자백이 망막한 수조의 물방울을 채웠다. 한정된 자세로 숨만 쉬는 유진의 몸체에서 당신의 말을 잘 듣고 있어요, 하는 비언어가 비췄다.
"길을 계속 가는데 항상 낭떠러지였어요. 낭떠러지 반대로 내달려도 다시 벼랑 끝이고, 또 다른 곳으로 도망가도 벼랑에 서 있고.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여기가 목적지가 맞나보다. 벼랑 밑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인가 보다. 마지막 생존자의 시체를 찾았는데 정말 나락으로 끌려가는 기분이었어요. 근데 그 사람이 부디 살아달라고, 유서에 그렇게 써놨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람이 지도에 그려놨던 이곳에서, 벙커에서 챙겨온 통조림을 다 먹으면 죽으려고 했어요."
비로소 죽음을 맞이하자 찾아오는 안온함이 얼마나 차갑고 포근했는지 혜준은 이곳에 온 첫날을 떠올렸다.
"근데 죽여달라는 유진의 말을 듣고 오기가 생겼어요. 살아야겠다. 죽지 말아야지. 온통 모순이죠."
혜준은 홀로 생을 이어가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악착같이 버텼다. 또 희망을 붙들었다. 실수로 연명하다가 타인에 의해서 또는 나 또는 타인과 나에 의해 존재 의미를 번복한다. 인간이기에 혜준은 감정을 열망했다. 아마 혜준은 지구에서 실수투성이로 소멸할 것이다. 원자 단위로 쪼개져 사고라는 걸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도 아마 유진과 함께한 이 순간들은 또렷하겠지. 혜준은 아득한 미래에 위로를 구했다.
"제가 있는 곳으로 올래요?"
그러나 아득한 미래는 코앞으로 다가온 손의 온기를 이길 도리가 없었다. 유진의 환영이 혜준에게 춤을 청하듯이 손바닥을 보였다. 아무것도 없지만, 여기로 와요. 근데 혜준이 실망할지도 몰라요.
"상관없어요."
유진이 있다면.
어디든 좋을 것 같아요.
7.
수조에 잠긴 유진의 몸뚱아리는 정말 껍데기에 불과했다. 유진이 빗대듯이 비유한 '스피커'라는 표현이 들어맞았다. 혜준이 레버를 올려 유진을 깨우기 전에는 위성에 담긴 채 까만 우주에 혼자 부유하는 일이 전부였다. 이제는 우주를 관망하기도 하며, 수조 안 몸을 통해 연구실 안 혜준을 볼 수 있었다.
유진, 지금 유진이 있는 행성은 이름은 뭐예요? 거긴, 아니, 여기는 제2의 지구에요. 들어본 적 있어요. 살아남은 사람들이 제2의 지구로 갔다는 소문을 얼핏 들은 적 있는 거 같아요. …그래요? 주위를 돌면서 우주선이라던가, 자동차는 못 봤어요? 글쎄요.
왜인지 물에 젖은 유진의 목소리는 안타깝게도 들뜬 혜준에게 닿지 않았다.
제2의 지구라. 혜준이 딛고 서 있는 지구에서 유일한 생존자일지 몰라도 제2의 지구에는 아니다. 미리 대피한 생존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그리고 유진도.
혜준은 다짐한대로 마지막 생존자가 준 통조림을 다 먹으면 죽으려고 했다. 그러나 혜준은 벼랑에서 그만 미래를 고대하고 말았다. 저를 향해 내밀던 유진의 손을 덥석 잡고 그가 있는 곳으로, 제2의 지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혜준은 부지런히 통조림을 해치워갔다. 통조림은 유진에게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고 혜준이 두 다리로 설 수 있는 에너지가 되었다. 유진이 맴도는 행성으로 떠나기 위해 풀었던 짐도 꾸렸다. 서두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탕비실 찬장에 넣어두었던 통조림은 두 개밖에 남지 않았다. 혜준은 두 개 중 하나를 집어 메인 연구실의 문을 경쾌하게 열어젖혔다.
"유진, 통조림이 하나 남았어요. 내일 바로 출발하기보다 그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게 좋겠죠? M-115에 시동이 걸릴지…."
"가지 말아요."
혜준은 캔을 따던 손을 멈췄다. 오지 말아요, 가 아닌 가지 말라니. 혜준은 맹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묻지 않아도 유진은 답을 줄 걸 알았기에.
"혜준이 레버를 올렸을 때부터 덫에 걸린 거예요."
"알아듣게 말해요."
"거기에 가도 전 없어요."
미동도 하지 않고 모진 말을 뱉는 유진이 처음으로 야속했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해요. 그럼 내가 싫다고 거절이라도 하게. 그런 말을 하면 상처만 받잖아요. 혜준을 덮은 살갗을 뚫을 기세로 세포가 요동쳤다. 그러나 혜준은 그대로 굳어 작은 근육조차 가누지 못했다.
연구원들은 에덴들이 폭주할 걸 알고 있었어요. 시간문제였죠. 저는 여기 지구에 남아 생존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어요. 생존자들을 제2의 지구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래서 폐기되지 않았어요, 저는. 비겁하게 살아남았어요. 제2의 지구는 저도, 생존자도, 아무것도 없어요. 거기에 가면 혜준은… 설치된 안드로이드들에 의해서 해부되고 신인류의 재료로 쓰일 거예요. 인류를 잇기 위해서 '영원한 세대' 프로젝트에 이용될 거라고요. 그러니까 가지 마세요. 저처럼 이용되고 버려지지 말아요. 애초에 혜준을 속이도록 프로그래밍 된, 뭣도 아닌, 인공지능이니까. 저는 인간이 아니에요. 이혜준은 끝까지 살아요.
유진의 코드명은 E-GENERATION. 에덴의 E가 아닌 'Eternal'의 E. 인간처럼 우악스럽게 살고 죽고 싶었던 AI.
"목적을 이탈했으니 이대로 전 자동 폐기돼요."
자동 폐기. 네 음절이 혜준을 움직이게 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혜준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휘어잡아 성큼성큼 수조로 다가섰다. 유진. 유진은 이름도 있잖아. 당신은 취향도 확고하고 노래도 부를 수 있잖아요. 잠도 잘 수 있어. 근데 어떻게 인간이 아니야. 지금까지 나한테 거짓말까지 했잖아. 인공지능은 거짓말을 못 해. 꿈도 꾸면서, 잘 때 사람처럼 꿈도 꾸면서 어떻게.
인간이 아니라는 유진의 말에 혜준은 유진이 인간일 수 밖에 없는 근거를 수 백 가지나 말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면에서 질서도 없이 증식하는 자모음 때문에 차마 밖으로 퍼붓지 못했다.
"그리고 거짓말 맞아요."
"…."
"꿈 못 꿔요, 저."
그 말을 끝으로 유진의 목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거치적거리는 흔한 인사조차 없었다. 유진? 유진!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줘요. 유진…. 무서워. 제발, 제 말이 들리면 대답해 주세요. 저 혼자가 아니라고 한마디만 해주세요.
혜준은 한결같이 푸른 빛을 내는 수조 앞에서 읍소했다.
0.
거짓말의 거짓말. 사실 저는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단 한 번이었지만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검은 해변 같은 공허 속에서 누군가의 울음소리만 들립니다. 그러더니 반짝, 하고 빛이 나요. 여기는 항상 나밖에 없었는데. 여기서 뭐 해요? 하고 물었어요. 어디 있어요? 제가 누군지는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아요. 신기해. 만나고 싶었어요. 저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보고 싶었습니다. 급하게 오다가 다치는 건 아닐까요. 천천히 와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언제….
아! 방금 혜성 하나가 떨어졌어요. 이름도 없이 태어나서 혜준이라고 붙였습니다. 당신이 제게 그랬던 것처럼. 지평선 너머 노을을 보고 저는 그것도 혜준이라고 이름 지어줬어요. 혜준처럼 동그란 행성에도, 흐릿하게 발광하는 별에도. 하나, 둘 이름을 붙여주다 보니 제 주변이 온통 이혜준이 되었어요. 울컥하고 당신이라는 우주가 저에게 쏟아졌습니다. 혜준은 이제 우주에 있는 어떤 행성에서도 보일 거고, 단위를 매길 새도 없이 밀려올 거예요.
나는 유진이에요. 저는 고민을 해요. 저는 죽고 싶기도 해요. 저는 노래를 잘 불러요. 저는 거짓말을 해요. 저는 꿈을 꿔요. 그리고 저는.
혜준을 좋아합니다.
8.
그 후 얼마나 지났는지 셈할 수 없었다. 주인도 없는 수조를 보고 있자니 하루는 한 달 같았고, 유진의 생각으로 밤을 꼬박 새운 날이면 한 시간이 일 분 같기도 했다. 우주복도 입지 않고 혜준은 온 은하계를 쏘다니며 매번 다른 시간대를 살아갔다.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에 맞춰 유진의 이름을 읊조렸다. 유진, 유진, 유진…. 혜준은 망연히 곧은 신념을 의심하며 저 자신을 괴롭힐 구실을 만들었다. 분명 유진에게 이름을 줬는데, 왜 보이지 않아. 공식처럼 꼬리를 물고 몸집을 불려가는 유진을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는 건 기계음이었다.
혜준은 유진의 존재가 잘려나간 날부터, 유진이 인간인 이유가 아니라 인간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이유를 떠올렸다. 처음으로 찾아낸 생존자였으니까. 내가 유진이라고 이름 지은 건 껍데기가 아니라 우주에 있는 유진이니까. 혜준의 가슴께에 차곡차곡하고 싶은 말들이 쌓여갔다. 혜준의 명치 속 우주는 지금도 성장통을 겪으며 부풀었다.
혜준은 돌연히 유진을 되돌릴 방법이 없나, 연구실에 남은 과학 서적을 정독하기도 하고, 허공에 유진의 이름을 닳도록 불러봤다가, 몇 천 장이 되는 문서들을 뒤져보기도 했다. 그러나 해결 방안은 유진이 말아쥐고 있었다. 유진의 껍데기는 애틋하게 목숨을 연장했다. 금방이라도 호흡기를 떼고 노래 부르듯이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에 메인 연구실을 쉬이 나서지 못했다. 곧잘 아른거리던 유진의 환영도 잔상조차 남기지 않았다. 영원히 폐기된 걸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까. 영원을 믿지 않던 혜준은 애달픈 상상에 '영원' 따위의 개념을 오려 붙였다. 그런 비참한 선동이 일 때면 혜준은 온종일 맥없이 끌려다녔다.
죽여주세요. 유진이 세상에 눈을 뜨며 빽 우는 대신 그가 뱉었던 첫 마디를 되새김질했다. 이런 마음이었구나. 이렇게 깜깜한 곳에 혼자 견뎌냈다니. 참 강한 사람이야. 그래서 죽고 싶었던 거야.
갑작스러운 이별에 증발한 혜준의 존재 의미.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그 곳에 누가 기다리고 있긴 해? 아직도 찬장에 통조림이 하나가 남았다.
메인 연구실 소파에 앉아 챙기다 말았던 짐과 반쯤 뜯긴 통조림을 응시했다. 사진에 찍힌 것처럼 시간이 멈춰있었다. 아, 사진. 혜준은 외로움을 앞장 세워 연구원의 방으로 향했다.
혜준은 액자를 들어 먼지를 털어냈다. 병으로 죽은 아들을 살려낸 연구원의 심정을 쓰다듬듯이. 저번보다 사진이 빛바래 있었다. 휠체어에 앉은 유진과 닮은 남자. 웃는 표정으로 푹 패인 볼이 가려졌다. 이 남자는 무슨 병마와 싸웠을까. 죽도록 살고 싶었겠지. 답답해 보여. 휠체어가 족쇄 같았겠다. 족쇄…. 족쇄.
그래, 유진이 족쇄라고 했어. 혜준은 메인 연구실로 뛰쳐 들어갔다. 그리고 패널에 끝까지 올라간 레버를 바라봤다. 이게 유진을 묶어두는 족쇄라면 끊어내야 했다. 혹시 폐기되지 않았다면, 폐기가 족쇄에 묶여있는 동안 한정된 거라면, 유진은 돌아올지 몰라. 이미 유진은 인공 지능이라는 변명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도박이었다. 유진은 영원히 사라졌거나, 자유로워지거나. 혜준은 제 손으로 올렸던 레버를 아래로 당겼다. 옆에 노란 경고 스티커를 무시한 채 빨간 버튼에 힘을 가했다.
빛은 어둠으로 돌아갔고 지하 연구실을 윙윙 울리던 기계음도 종적을 감췄다. 유진, 제 목소리 들려요? 어디 있어요? 혜준은 목젖 뒤가 시큰거려 나오지 않은 목소리를 쥐어짜며 소리쳤다. 잠적이 가라앉았다.
"유진…? 대답해요."
앞이 뿌옇게 뭉그적거렸다. 세상이 윤곽선을 잃고 하나로 엉겨 붙어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뭉개진 세계 위로 혜준을 일으켜 세운 건.
"혜준…. 이혜준이에요?"
그토록 현실에서 꿈꿔오던 유진의 목소리였다. 혹여 항상 기억 못 하던 꿈이 아닐까, 그렇다면 다시 흠뻑 꿈에 취하도록 눈을 감았던 날들. 덩이 졌던 사물들이 제 선들을 찾았다. 혜준을 둘러싼 우주가 움직였다. 놀랐잖아요. 어디 있다가 이제 와요. 미안해요, 너무 깊게 잠들었나 봐요.
어디에 있는지 유진이 말 안해줘도 알 거 같아요. 기다리기만 해요. 제가 찾아 갈게요.
천천히 와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언제든지."
9.
노란 컨테이너 밖으로 나오니 나무들이 머리칼을 부대끼며 아직 여기에 살아가는 혜준을 살폈다. M-115의 커버를 벗겼다. 또 보네. 이번에 우주로 가야 해. 할 수 있지? 유진을 찾으러 가자. 이 숨바꼭질의 끝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혜준의 가치가 지구에 잔존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혜준은 운전석에 몸을 가볍게 실었다. 주머니에서 유진의 실험 일지 마지막 장을 펼쳤다. 이게 지도였다. 귀퉁이에 적혀있던 '37404535.52'는 좌표였다. 여기에 유진이 있을 것이다. 혜준은 신도, 영원도 믿지 않았지만, 결국 유진 에게 낙착되는 직감을 믿었다. 내비게이션에 좌표를 입력하자 지구의 우주 정거장으로 안내를 시작했다. 목적지까지 예상 시간을 알려주던 좌측 하단에 'Error'가 떴다. 지금 시작하려는 여정이 얼마나 걸릴지 가늠할 수 없었다.
혜준과 유진 사이의 경우의 수는 단 하나로 귀결될 뿐이었다. 그래서 이 여정은 지름길도 없는 외길이다. 드넓은 우주에서 혜준이 처음으로 개척하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혜준은 대시보드에 뜯지 않은 통조림 한 캔을 올려두었다.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누르니 유진의 노래가 내부에서 넘실거렸다. 시동을 걸었다. 지구상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연료가 될 것이다. M-115는 여전히 토하듯 골골거렸다. 걱정 없다. 혜준은 다리를 쭉 펴고 액셀을 밟았다. 계기판이 휘청 뛰어올랐다. 데이터로 수치화할 수 없는 속도로 나아간다. 테일램프의 빛이 도로 위에서 일렁였다.
나는 기꺼이 당신의 세계에 종말을 가져오겠다. 그 꿈을 끝내고 눈을 뜨고 마주하겠다. 감히 숫자로 표할 수 없는 거리를 뛰어가 당신의 품에서 팽창할 것이다. 함께 꿈이 침범하지 못 하는 낮잠에 들자.
그 시각, 우주는 태양과 1억 5천만 km 떨어진 작은 행성에서 최후의 인류가 최초의 여정을 떠나는 걸 목격했다.
* 각주: 글을 읽고 꼭 들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