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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oustic Breath한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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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준과 유진의 유년이 만난다면,

 

차오르는 우리에게

 

 선택으로 삶이 안배된다면, 선택은 무엇으로 안배될까. 교실에 간결하게 떨어지는 건반 소리를 들으며 혜준은 어릴 적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갔던 피아노를 떠올렸다. 고모의 슬프냐는 질문엔 아니라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혜준은 고조되는 곡을 가만히 들었다.

 

 혜준이 선택한 학교는 절실한 장학금을 주는 대신 1인 1동아리라는 귀찮은 구석도 있었다. 특이한 이름의 교장이 주도했다 하던데, 이름이 허재였던가. 혜준은 영화감상부나 베이킹부에 같이 들어가자는 친구들 사이에서 음악감상부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시간도 돈도 그리 많이 들 것 같지 않은 이 부서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 판단했다.

 

 혜준의 교실에서 이뤄진 첫 동아리 시간, 구성원은 단출했다. 동아리 담당 선생님이자 담임선생님인 채이헌 선생님과 다섯 명의 학생들. 자기소개를 하고 보니 혜준만 2학년이고 모두 3학년이었다. 선생님을 보고 감탄을 터뜨리는 2명의 여자 선배, 그중 한 명에게 헤실 한 표정을 짓는 남자 선배 그리고 심드렁한 남자 선배. 아슬아슬하게 정원만 채운 모양새였다.

 

“음악을 다양하게 느껴보는 시간이라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

 

 채선생님은 손수 잘라온 종이에 앞으로 음악감상부에서 하고 싶은 것을 써보라고 했다. 혜준은 잠시 생각하다 「교실에서 음악 듣기」를 썼다. 덜렁 한 줄만 쓰기 뭣해 한 줄 더 붙였다.

 

「베토벤 비창 3악장」.

 

 음악은 계속 흘러나왔다. 음률은 더 잘게 쪼개지고 연주자의 손가락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본격적인 동아리 활동의 포문으로는 혜준이 쓴 쪽지가 채택된 것 같았다. 선생님은 꽤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연주 영상들을 준비해오셨는데, 첫 곡으로 비창 3악장을 틀어주셨다. 혜준은 곡이 끝날 때쯤 슬픈 피아노를 떠나보내고 중간고사와 장학금을 곱씹었다. 어젯밤 들었던 고모의 한숨 소리가 컸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혜준이가 듣고 싶었던 곡인데. 곡 이름이랑 듣고 싶었던 이유를 얘기해줄 수 있을까?”

 

 연주가 끝난 자리에 선생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혜준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네…. 베토벤 비창 3악장입니다. 듣고 싶었던 이유는…. 그냥 곡이 좀 슬퍼서요….”

 

 늘 명료하게 말하는 혜준의 말끝이 흐려졌다. 채 선생님은 잠깐 의아한 표정을 띄웠다 서글하게 가라앉혔다. 선생님의 자상한 고맙다는 말을 들으며 앉을 때 뺨 언저리가 간지러웠다. 선생님이 다음 신청곡을 틀겠다고 하실 때 앉을 때 혜준의 뺨을 시선으로 두드린 주인을 찾아 슬쩍 둘러봤다.

 

 심드렁한 선배가 고개를 틀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혜준은 뒤를 봤으나 아무도 없었다. 5명밖에 없는 부원들은 두 번째 줄에 주르륵 앉았어야 했고 혜준은 창 쪽, 선배는 복도 쪽 끝에 앉아있었으니 그럴 만했다. 뭐지. 혜준은 시선을 끊고 다음 곡으로 틀어주신 드라마에 나왔던 유명해진 연주곡을 들으며 노트에 끄적끄적 중간고사 계획을 세웠다. 여전히 간지러운 관심에 입안의 여린 살이 붓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클래식 좋아해?”

 

 혜준은 오후의 볕으로 달궈진 교실을 고개를 돌려 둘러봤지만 공교롭게도 질문을 던진 사람과 자신, 둘 뿐이었다. 혜준은 필통을 마저 챙기고 예의상 질문한 사람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는 크고 꽤 부리부리한 인상을 가졌다. 학교에서 꽤 눈에 띄는 사람일 것 같았다.

 

“어. 왜?”

 

 신경을 끄라는 의미에서 거칠게 대답했다. 아까 연주 영상을 볼 때 신경을 거스르게 한 작은 복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

 

“아니- 그냥 신기해서.”

“너는 좋아해?”

“아니.”

“그럼 여기 왜 들어왔는데?”

“그냥.”

 

 싱겁다. 혜준은 그대로 일어서서 교실을 나섰다. 그는 뭐라 더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굳이 혜준을 다시 불러세우진 않았다. 혜준은 잠깐 본 명찰에 쓰여 있던 이름을 떠올렸다. 한유진. 교포 같은 이름이네.

 

* * *

 

 중간고사 결과는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마리도 꽤나 괜찮은 성적을 받았다. 마리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제 색을 분명히 내는 아이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반짝임에는 가속도가 붙는 것 같았다. 고모는 그런 마리를 기특해하고 자랑스러워했다. 고모는 어둑한 한숨 소리를 언제 냈냐는 듯 고생한 마리와 혜준에게 갖고 싶은 것을 사주겠다고 했다. 마리는 조금 망설이다 고급 샤프를 골랐고, 혜준은 다음을 기약했다. 고모와 마리는 몇 번이고 권했지만, 혜준은 다음에 가지고 싶은 게 생기면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혜준은 그 기약에 자신의 처지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고모가 덜 힘들다면, 고모부가 안정적인 직장에 정착하신다면, 자신이 마리와 같은 딸이었다면- 기약은 확신보다는 소망에 가까운 약속 아닌가. 덧붙여진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 사실 거절의 가장 큰 이유는 선뜻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혜준은 새삼 스스로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문방구에서 100원, 200원 하던 장난감을 누구보다 잘 고르던 초등학생이 타인의 필요와 취향을 더 빠르게 짚어내는 고등학생으로 자랐기 때문이었다.

 

 복잡한 생각의 타래가 채 풀리기도 전 혜준은 마리의 취향을 떠올리고 있었다. 채 선생님은 퍽 낭만 있는 사람이라 음악을 질감으로 기억하는 법도 있다며 규모가 있는 음악 관련 잡화점으로 부원들을 데리고 왔다. 좋아하는 음악을 원하는 형식으로 들어보라며 학교에서 지원해주는 동아리 활동비로 음악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주시겠다고 했다. 혜준은 쉬운 걸음으로 최근 마리가 멋있다고 했던 아이돌 앨범의 매대 앞으로 갔다.

 

“아이돌 좋아해?”

 

 기척도 없이 다가온 유진이 바로 옆 칸에서 혜준에게 말을 붙였다.

 

“아니. 그다지.”

“클래식은 저기 있던데.”

 

 지난번의 대화를 기억하는 걸까. 타인의 흥미를 쫓아온 자신에게 저의 대답으로 안내하는 상황이 묘했다. 혜준은 화려한 앨범에서 눈을 떼고 유진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한 손으로는 아이돌 앨범을 뒤적이고 다른 한 손에는 고른 듯한 DVD를 들고 있었다.

 

“네가 고른 건 뭐야?”

“뮤지컬 실황.”

“뮤지컬 좋아해?”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아이돌 앨범을 내려놓고 혜준과 눈을 맞췄다.

 

“어, 좋아해.”

 

 진지한 답이었다. 눈 밑이 조금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혜준은 비장하기까지 한 유진과 잠시 눈을 맞추곤 돌아서서 클래식 코너로 갔다. 묵직한 나무를 연상하게 하는 앨범 표지들이 나열되어있었다. 수록곡들은 거진 영어로 적혀있었지만 조금 전 아이돌 앨범보다 훨씬 잘 읽혔다.

 

 혜준은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른 매대를 돌아다니면서도 뮤지컬 실황 DVD를 놓지 않은 유진의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음미하고 싶은 좋아하는 것.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오롯한 나의 취향. 비루한 지갑을 들여다보지 않고 잡을 수 있는 용기. 진지하게 고백할 수 있는 마음.

 

 혜준의 걸음이 피아니스트들의 앨범 옆의 악보 매대 앞에서 멈췄다. 신중하게 악보들을 손가락으로 짚다 베토벤 비창 소나타의 악보집을 뽑았다. 어렸을 때 봤던 악보보다 훨씬 많은 음표에 미간이 찌푸려지긴 했지만 내려놓지는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음표를 따라 흘러나올 음들을 그려봤다. 마음에 들었다.

 

 혜준은 가슴께에 악보를 들고 채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는 계산대로 갔다. 다른 매대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유진이 자신을 보며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집에 돌아오는 길, 가로수에 맺힌 여린 잎사귀들이 싱그러웠다. 혜준은 미래의 자신이 여전히 이 곡을 좋아하기를, 피아노에서 지금 자신이 고른 악보를 펼치기를 바랬다.

 

* * *

 

 날이 서서히 더워지고 있었다. 혜준은 주머니 속 동전과 앞으로의 지출을 곰곰이 셈하다 교실을 나섰다. 학교에는 매점 대신 층마다 자판기가 있었는데, 혜준은 제 교실이 있는 2층이 아닌 3층의 붐비지 않는 자판기를 이용했다. 혜준은 자판기 앞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먹을지 말지를 고민했다. 친구들이 한 입씩 감질맛나게 나눠줬던 음료수들이 보이긴 했지만,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난 오렌지 주스.”

 

 뒷덜미에서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유진이 생글생글 웃으며 오렌지 주스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3층은 3학년 교실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돈 없어요.”

“그럼 사줄게.”

 

 뭐가 이렇게 자연스러워. 혜준은 기가 찼지만 사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유진이 오렌지 주스 버튼을 누르자 혜준도 같은 버튼을 눌렀다. 툭툭 떨어진 캔들을 주워 혜준에게 건네준 유진은 단숨에 자신의 오렌지 주스를 쭉 들이켰다.

 

“난 싸운 후에 꼭 오렌지 주스가 땡기더라고.”

 

 혜준은 시원한 캔을 만지작거리며 친구들에게 들었던 유진에 대한 소문을 하나씩 떠올렸다. 중학생 때 주먹으로 유명했다는 경계대상, 상위 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선생님들의 기대주, 싸움이 나면 선생님께 이르고 사라지는 패기왕, 때마다 사물함에 가득 차는 선물들의 주인, 날티 나는 어른들과 같이 다니는 수상한 학생. 어쩐지 교복보다는 정장이 잘 어울릴 것 같은 흡입력 있는 분위기를 두르고 있기에 신빙성이 있었다. 하지만 혜준은 소문을 믿고 싶지 않았다. 혜준에게 유진의 눈빛은 곧았고 질문은 깊었다.

 

“싸웠어요?”

 

 유진은 씩 웃기만 했다. 어째 저 소문 중 하나는 확실한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유진은 자연스럽게 혜준의 옆에 서서 2층 교실로 함께 걸었다. 오늘은 유진의 제안으로 뮤지컬 영화를 보는 날이었다. 유진은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교실로 오는 몇 걸음에 툭툭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 3학년 4반, 금융경제학과, 중간고사 잘 봐서 기분 좋음, 뮤지컬은 DVD가 아닌 실제로 보고 싶음, 너는? 마침 교실에 도착했다.

 

“그땐 고마웠어.”

 

 혜준은 제 할 말만 하고 교실로 들어갔다. 유진은 총총 따라와 혜준의 옆 분단에 앉았다. 여자 선배들과 남자 선배의 거리는 좀 더 좁혀져 있었다. 지난 시간에 남자 선배가 자기가 산 물건을 여자 선배한테 주던데, 용케 마음을 얻었나 보다. 그럼 유진이 준 오렌지 주스는 뭘까. 애초에 왜 나한테 말을 걸었을까? 갑자기 제 옆에 건너 앉은 유진이 의뭉스러워졌다. 힐끗 고개를 돌리자 유진은 눈을 접으며 씩 웃었다. 유진은 자신을 볼 때마다 웃는 것 같았다. 영화를 볼 준비를 끝낸 채 선생님이 주의를 환기했다.

 

“오늘은 유진이가 보고 싶던 영화를 볼 텐데요, 유진아- 이 영화에 대한 소개와 보고 싶었던 이유를 얘기해줄래?”

 

채 선생님의 부드러운 제안에 유진은 입만 웃으며 답했다.

 

“영화는 맘마미아이구요, 뮤지컬이라서요.”

 

 채 선생님은 참을 때 짓는 눈썹 꿈틀이를 시전하고 영화를 트셨다. 어쩐지 둘이 안 맞는 것 같다. 채 선생님 좋은 분인데. 잠시 동정의 눈으로 선생님을 보자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이셨다. 유진은 맘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몸을 한껏 뒤로 눕혔다. 혜준은 채 선생님을 위해서라도 동아리 활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 다짐했다.

 

I have a dream, a fantasy

To help me through reality

And my destination makes it worth the while

Pushing through the darkness still another mile

 

 유진은 영화에서 전주가 흘러나오자 천천히 몸을 세웠다. 잡화점에서 잠깐 봤던 눈빛이 서서히 새어 나왔다. 뮤지컬을 좋아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던지 진심으로 흥미로워하는 모양이었다. 입꼬리가 슬쩍슬쩍 올라가고 노래를 따라 하기도 했다. 혜준은 이유 모를 배신감에 유진에게서 관심을 거뒀다. 장래 희망이라는 빈칸을 망설임 없이 써 내려가는 사람들에 대한 반사적인 감정. 그에게서 마리에게 이따금 느꼈던 질투의 파편을 느꼈다.

 

 혜준은 꿈과 환상을 좇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아빠와 고모부. 그들은 잡지 못할 것들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걸음에는 누군가의 눈물과 고통이 필연적으로 따라왔다. 혜준의 꿈이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닌 수치화할 수 있는 것들로 바뀌게 된 것도 허황된 것들에 현혹되지 않기 위함이었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들이 그렇지는 않다 항변하고도 싶었지만, 혜준은 이미 그들로 인해 포기한 것들이 많았다. 솔직해지자면 겁이 많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자신이 초라해 보여 단단히 빗장을 걸어둔 것일 테다.

 

 영화는 젊은이들이 처음 나왔던 노래를 부르며 그들만의 모험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영화가 끝난 후 간단한 감상문을 적으며 혜준은 자신의 독립이라는 꿈도 어딘가를 떠나는 것이라 애써 위로했다.

 

“어땠어?”

 

 가방을 멘 혜준의 옆에 유진이 자연스럽게 붙으며 물었다.

 

“신나더라.”

“그게 끝?”

“선생님한테 감상문 보여 달라고 해.”

 

 혜준의 샐쭉한 대답에도 유진은 입꼬리를 올렸다. 혜준은 그 가벼운 웃음에 저도 모르게 툭 물었다.

 

“뮤지컬 왜 좋아해?”

“음……. 심장을 뛰게 하거든. 뮤지컬 배우 하고 싶은데, 뭐 그래.”

 

 제 입으로 뱉은 말들에 머쓱했는지 유진은 맞추던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생략된 무언가가 있었지만 지금 제게 표현한 마음이 정직한 것 같았다. 해가 강해서인지 유진을 둘러싼 조도가 높아졌다. 검은 머리가 눈 근처를 배회하자 옅은 눈동자가 눈꺼풀에 살짝 덮였다. 꿈을 꾸려는 사람 같았다.

 

  혜준은 까만 밤이 되어서도 어쩔 도리 없이 오후를 곱씹었다. 매혹적인 생의 부름이 혜준의 눈동자에 새겨진 것 같았다. 뒤척이던 이불자락이 멎어들 때쯤 혜준이 조심스레 가설을 세웠다. 어쩌면 꿈은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아닐지도 몰라.

 

* * *

 

 방학이면 혜준과 마리는 거실에 상을 펼치고 공부를 했다. 여름의 도우미는 낡은 선풍기 한 대였다. 마리는 학기만으로는 따라가기 벅찬 학교 공부를 했고 혜준은 학교에서 취득을 권장하는 자격증 공부를 했다. 혜준은 마리의 책들을 살며시 훔쳐봤다. 책들은 두께도 무게도 비슷했지만 어쩐지 자신의 책이 더 무거워보였다. 몇 푼의 아쉬움을 구구절절이 체감하게 하는 현실의 닻. 사각거리는 마리의 필기 소리가 경쾌했다. 열망과 순수함으로 어디든 나아가게 하는 돛이 펼쳐지는 소리였다. 혜준은 그 파도 소리에 자신의 닻이 심해까지 내려지는 기분이었다.

 

“마리야 아이스크림 먹을래? 내가 사 올게.”

 

 혜준은 그 파도에 못 이겨 뭍으로 나오기로 했다. 마리의 주문을 받고 혜준은 신발 앞코를 툭툭 바닥에 두들기며 밖을 나섰다. 근처에 있는 작은 구멍가게를 가도 되지만 좀 걷고 싶어 멀리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한낮의 여름은 뜨거웠다. 혜준은 손 갓을 만들고 천천히 걸었다. 졸업은 앞으로 1년 반이 남았다. 그동안 독립을 준비할 수 있을까.

 

 아니면……. 혜준은 파도에 밀려든 질문을 애써 외면했다. 고모부가 흥분하며 터질 수밖에 없는 투자처를 찾았다며 통화하는 것을 들었다. 아마 고모와 마리는 모르는 전화일 것이다. 혜준은 고모부에게 진지하게 그만두라 할 수도, 고모와 마리에게 언질을 주기도 어려웠다.

 

 편의점에서 2+1 상품으로 아이스크림 3개를 집어 들었다. 혜준은 자신이 주력 상품의 후광에 힘입어 광고 정도 해줄 수 있는 끼워주는 상품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딸랑거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편의점을 나와 모퉁이를 돌았을 때 고개를 숙인 채 건물 외벽에 기대어 있는 유진이 있었다.

 

“여기서 뭐 해?”

 

 유진의 왼쪽 얼굴은 조금 부어있었고 옷도 군데군데 늘어나 있었다. 혜준은 그늘진 외벽 앞으로 다가섰다. 그답지 않게 질문에 답이 없었다. 혜준은 자신이 괜한 참견을 하는 것 같아 갈 길을 갈까 하다 어디서 많이 본 눈빛에 멈춰 섰다.

 

“왜 그래?”

“…… 그만둘까?”

“뭘?”

“그냥 말해봐. 할까? 말까?”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였다. 목소리는 조금 떨리는 듯했다. 여름에 훈수 두는 매미 소리가 따가웠다. 혜준은 유진에게 이 순간이 굉장히 중요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유진이 잡고 있으려 했던 것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았다.

 

“네가 좋아하는 거, 그런 거 갖기도 찾기 어려워. 심장이 뛴다면서.”

“…맞아.”

 

혜준은 학교에서 보자는 말과 아이스크림 하나를 유진에게 쥐여준 후 돌아섰다. 그의 조명이 꺼질 듯 위태로웠다. 그 불빛이 꺼지면 유진은 어디로 갈까. 스위치를 내린 곳으로 갈까, 그림자를 좇을까. 어른들이 가지라는 꿈은 갖기에는 분수에 넘치는 것, 서서히 포기해야 할 것일까. 혜준은 자신이 건넨 아이스크림이 덤으로 건넨 동정이 아닌 위로와 답이 되길 바랐다.

 

* * *

 

 2학기는 3학년들의 진학과 취업으로 한창 부산스러웠다. 학교에서는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공무원 시험에 붙은 선배들의 이름은 넣은 현수막을 몇 개씩 걸기도 했다. 혜준은 교문에서 그 현수막들을 세며 나열된 현수막을 세며 얼마 전 마리와 나눈 이야기를 복기했다. 마리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혹시’라는 말을 덧붙이며 유학을 논하기도 했다. 혜준은 새삼 자신의 목표가 비루해 보였다. 자신에게는 절실한데, 누구에게도 쉬이 얘기하기 어려웠다. 독립이라고 표현은 하지만 사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하기가 꺼려지는 건 아닐까.

 

“일찍 나왔네.”

 

 상념을 끊은 건 유진이었다. 그날의 흔적은 사라진 멀끔한 모습이었다.

 

“선생님이 먼저 나와 있으라고 하셔서.”

“아직 더운데. 생각이 없네….”

 

 뒤이어 나오는 다른 부원들의 목소리에 뒷 말이 흐려졌다. 남자 선배의 일방적인 구애는 이제 쌍방이 된 듯했다. 다른 여자 선배는 그 상황을 뿌듯해하는 것 같았다. 늦게 나오신 채 선생님은 미안함에 간식을 약속하며 함께 예술회관으로 이동했다. 유진은 툭 혜준에게 고맙다는 말을 던졌다.

 

“아이스크림 맛있더라.”

 

 유진이 고마워하는 건 아이스크림뿐만이 아닌 듯했다. 유진은 자신이 아르바이트하는 소극장에 놀러 오라고 했다. 운이 좋으면 공짜로 연극을 볼 수 있다고도 했다. 혜준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예술회관에는 오늘 볼 공연의 포스터가 크게 붙어있었다. 시에서 격달로 진행하는 무료 클래식 공연인데 수준이 높다고 했다. 자리는 만석에 가까웠다. 푹신한 고급 의자에 차례차례 앉았다. 이제 막 시작된 풋사랑 둘, 이를 지키는 수호자, 유진, 혜준, 채 선생님. 혜준은 이 불편한 구성을 어떻게 한 시간 반이나 견뎌야 하나 난감했다.

 

“혜준아, 이런 공연 많이 와봤어?”

 

 채 선생님의 다정한 질문에 지레 찔린 혜준이 빠르게 대꾸했다.

 

“아니요, 처음이에요.”

“그렇구나. 오늘 혜준이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다. 브로셔 보니까 비창 3악장도 있더라.”

 

 혜준은 별 기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객석이 어두워지고 커튼이 올라갔다. 어렵지 않은, 주변에서 충분히 찾고 누릴 수 있는 클래식을 소개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는 지휘자의 소개로 공연이 열렸다. 익숙한 화음의 연결인가 했더니 연주자의 호흡과 몸짓이 느껴지는 연주가 온 감각을 파고들었다. 이어폰으로만 듣던 것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혜준의 몸이 서서히 앞으로 기울어졌다. 비창 3악장을 들을 땐 전율이 느껴지기도 했다. 혜준은 음악이, 또 그에 반응하는 자신이 이렇게 생생한 줄은 몰랐다. 감각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영혼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좋았어?”

 

 공연이 모두 끝난 후 상기된 볼로 열심히 박수를 치던 혜준에게 유진이 물었다.

 

“어. 너무 좋았어.”

“좋네.”

 

 유진은 과장된 목소리로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쳤다. 채 선생님은 팔을 휘적거리며 유진을 만류했지만, 혜준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 찬사를 받기에 마땅한 공연이었으니. 혜준은 얼얼한 손바닥을 문지르며 책장에 반듯하게 꽂아둔 악보의 감촉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열심히 박수를 치던 유진에게 건넨 아이스크림의 의미를 생각했다.

 

 심장이 뛰는 것, 여운을 남기는 것. 적어도 마리와 나눴던 대화에서 산출된 돈은 아닌 것 같았다. 혜준은 좀 더 욕심을 내기로 했다. 취향이든 꿈이든. 즐거웠다.

 

* * *

 

 학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인 마지막 동아리 활동 시간에는 제비뽑기로 선물을 주고받기로 했다. 특별히 대단한 추억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사가 오고갔던 이들이었기에 혜준도 성의 있게 준비했다. 소소한 선물 뽑기 후에는 한 해 동안 음악감상부가 어땠는지 얘기하는 시간도 있었는데, 모두 생각보다 재미있었다는 반응이었다. 처음에 왜 시작했는지도 얘기해보라 했었는데, 다들 우물쭈물하며 넘어갔다. 혜준도 포함되어있었다.

 

 채 선생님은 모두에게 선물을 주고 자신의 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제안하셨다. 미리 얘기하려 했는데 깜빡해 오늘 얘기하게 되었다고도 덧붙이셨다. 평소에도 반 아이들을 4~5명씩 묶어 초대했던 선생님의 정성과 마음을 경험한지라 혜준은 순순히 간다고 대답했다. 유진은 반 박자 늦게 간다고 했고 나머지 선배들은 안타까워하며 이미 일정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대신 졸업 후에 찾아뵙겠다고 약속했다. 채 선생님은 빙긋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채 선생님은 자신의 차에 혜준과 유진을 태워 집으로 안내했다. 꽤 아늑하고 정갈한 곳이었다. 저녁이 다 준비될 때까지 집 구경을 하라고 하셔서 휘적휘적 돌아보는데 금세 부르는 목소리가 났다. 미리 준비해두신 듯했다.

 

식탁에는 익숙한 음식과 생경한 음식이 고루 섞여 있었는데 오늘의 주메뉴는 로제 두부와 갈치조림이라고 하셨다. 혜준은 초대받은 사람의 성의 표현에 진심을 더 해 맛있다는 말과 음식에 대해 질문하며 식사를 이어갔다. 유진은 투덜거리는 것 같았는데 음식은 입에 맞는지 싹싹 긁어먹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유명한 베이커리의 조각 케이크들과 코코아까지 나왔다.

 

“선생님 저희 안 왔으면 음식 다 어떻게 하려고 했어요?”

“뭐, 혼자 천천히 먹었겠지.”

 

 채 선생님은 유진의 이죽거림도 여유롭게 대응하셨다. 혜준은 왠지 긴장감이 느껴져 채 선생님이 이것저것 물어볼 때 일부러 물음에 길게 답했다. 유진은 의미모를 표정을 짓더니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 자리를 비웠다. 채 선생님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여러 케이크를 한 입씩 먹고 있던 혜준에게 말을 붙였다.

 

“혜준아, 혜준이는 무엇이든 잘할 거라 생각해.”

 

 갑작스러운 칭찬이었다. 반에서 그리 튀지 않는 학생이고 담임선생님이지만 그리 접점이 없었기에 채 선생님에게 이런 얘기를 들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얼떨떨하게 감사하다고 답하자 채 선생님은 자상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냥, 1년 동안 혜준이 보면서 뭐랄까 보편적인 것 같으면서도 자기 색깔 분명한 초여름 아침 일곱 시 햇살 같은 친구라고 생각했거든. 쨍하니 맑고 밝고 청량하고, 그러면서도 날카롭고 언제든 뜨거워질 준비가 되어있는.”

“제가요…?”

“그래. 근데…. 선생님이 혜준이에 대해서 다는 모르니까 함부로 얘기할 수 없는데, 혜준이가… 좀 더 욕심냈으면 좋겠어.”

 

채 선생님은 자상하게 혜준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하고 싶은 게 없을 수도 있어. 괜찮아. 다만 혜준이가 앞으로 선택의 범위를 넓혀갔으면 좋겠다.”

 

 채 선생님은 빙긋 웃은 뒤 혜준에게 마저 먹으라 권했다. 때마침 돌아온 유진과 투닥거림도 다시 시작되었다. 혜준은 채 선생님의 관심에 대한 고마움과 훈기 도는 인정에 숨이 따듯해졌다. 생일 때 늘 먹던 생크림 케이크가 아닌 꾸덕한 치즈 케이크가 참 맛있었다. 혜준은 좋아하는 것에 오늘의 케이크를 기억하기로 했다.

 

* * *

 

 해가 지고 있어 각자의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 하는 채 선생님에게 유진은 부득불 혜준과 같이 내리겠다고 했다. 채 선생님은 콧바람 섞어 웃으시더니 혜준의 집 근처에서 내려주셨다. 몇 번이고 인사를 하고 떠나는 채 선생님의 차 꽁무니를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유진이 부스럭대고 있었다. 혜준이 설렁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유진이 황급히 혜준을 불렀다.

 

 혜준이 다시 몸을 돌리자 유진은 부스럭거리던 손으로 크라프트지로 포장된 무언가를 내밀었다. 혜준은 선물을 물끄러미 보다 유진의 얼굴로 초점을 옮겼다. 유진의 귀가 조금 빨개진 것 같았다.

 

“그냥 선물 사면서 샀어.”

 

 혜준은 잠시 유진을 보다가 손끝을 스치며 선물을 받았다. 채 선생님의 집에서 느꼈던 몽글함보다 더 쫀득한 무언가가 혜준의 뱃속을 어지럽혔다.

 

“졸업하고도 계속 볼 수 있을까?”

 

 선물에 묻어있는 마음을 묻기 전 유진이 먼저 물어왔다. 연락처도 주고받지 않은, 인사 정도만 주고받는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는 별 가망성이 없었다. 하지만 혜준은 자신도 모르게 내리고 있던 닻을 올리고 돛대를 점검하게 해준 유진이 고마웠다. 많은 시간은 아니지만, 추억이라는 것을 공유한 그가 의식되기도 했다.

 

“한유진.”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또렷이 불러봤다.

 

“고마워. 그리고 포기하지 마. 잘할 거야.”

 

 봄의 발견, 여름의 위로, 가을의 다정함을 담아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유진의 눈이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갈게.”

 

 유진은 약간 얼이 빠진 것 같기도 했다. 혜준은 피식 한 번 더 웃은 후 천천히 걸었다. 선물을 풀어보니 빨간 목도리였다. 어떤 드라마에서 고백할 때 준 선물이던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밤공기가 맑았다. 겨울의 용기는 혜준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혜준은 열여덟의 끝에서 정착이 아닌 항해를 시작하기로 했다. 막막한 건 매한가지이지만 폭풍우에 휩쓸린 사람들에게 구명조끼를 건네고 해일을 관측해 사람들에게 알리면 어떨까 하는 막연한 바람이 들었다. 혜준은 자신의 삶을 덮쳤던 돈이라는 파도에 압도되지 않고 싶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 * *

 

“취미반은 주 1~2회 부담 없이 오시면 돼요.”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피아노 학원은 고요했다. 안쪽의 연습실에서 미약하게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먹먹한 배경음악에 가까웠다. 혜준은 3개월 치 수강료를 망설임 없이 결제했다. 세종으로 온 후 혜준이 가장 먼저 한 건 피아노를 사는 것과 피아노 학원을 알아본 것이었다. 혜준이 혼자 사는 집에는 차곡차곡 모아둔 치고 싶은 곡의 악보가 벌써 한 더미였다.

 

“그럼 다음 주에 뵐게요.”

 

 우아한 선생님과 눈인사를 마친 찰나 연습실에서 선객이 나왔다. 큰 키의 부리부리한 인상, 흡입력 있는 분위기, 곧은 눈빛-

 

“이혜준?”

 

 유진이었다.

 

“여기 다녀?”

“오늘 등록했어.”

 

 유진은 퍽 반갑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선생님은 신기한 인연이라며 혜준과 유진을 배웅했다. 유진이 잠시 얘기라도 하고 가자기에 거리로 나왔다. 어딘가를 가기엔 애매한 시간인지라 근처 편의점에서 팩 소주 하나씩을 사서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10여년 만의 만남 사이로 아직은 찬 바람이 불었다.

 

 혜준은 팩소주를 한 모금 쪼옥 넘겼다. 유진도 따라 쪼륵 마셨다. 잠깐의 정적이 이후 혜준이 채 선생님의 이야기로 서두를 꺼냈다. 교사 출신이지만 교육부에서 꽤 높은 자리까지 갔다는 이야기에 유진은 아직도 연락하냐고 되물었다.

 

 유진은 몇 번의 재수 끝에 연기를 배우는 대학에 들어갔었다고 했다. 졸업 후에는 배역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쫓아가 가리지 않고 오디션을 봤다고 했다. 지금은 어떤 뮤지컬의 앙상블 팀에 들어가 있고 곧 비중 있는 조연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세종은 어머니가 새롭게 자리 잡으신 터라고 하셨다. 혜준이 등록한 바하마 피아노 학원의 선생님이 유진의 어머니라고 했다.

 

 혜준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유진의 얼굴 근육과 눈썹을 관찰했다. 그때도 이렇게 표정이 많았던 사람인가. 이전에도 그리 잘 알았던 건 아니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혜준도 제 얘기를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경제학 공부를 했고 전공을 살려 공무원이 되었으며 세종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유진은 가만히 듣고 있다 혜준의 말이 끝난 후 천천히 말꼬리를 물었다.

 

“하고 싶었던 거야?”

“해봐야 알겠지만, 일단은.”

 

 혜준을 보고 있던 유진의 눈과 이제 막 들어 올린 혜준의 눈이 마주쳤다.

 

“고생했겠네.”

 

 유진의 눈은 추억에 묻힌 그 어느 때를 떠올리게 했다. 오선지 위에 얹어진 손끝으로 느껴지는 영혼의 기쁨, 맛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나를 발견했을 때의 희열, 타인을 북돋을 때 생기는 힘.

 

“너도, 잘해왔네.”

 

 혜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과 자신이 벅찼다. 우리는 기어코 살아냈고, 삶을 일구었구나. 유진이 건배를 하자는 듯 팩 소주를 내밀었다. 소리 없는 건배가 이뤄졌다.

 

“근데 그때 목도리 왜 줬어?”

 

유진은 사레가 걸린 듯 소주를 뱉어내며 마른기침을 했다. 혜준은 태연히 목으로 넘겼다. 유진은 자신과 주변을 정리한 후 한참이나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 빨간색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빨간색 그다지 안 좋아하는데.”

 

유진은 마른세수를 했다. ‘젠장’이라는 말도 들린 것 같았다. 유진은 소주를 다시 입에 가져갔다.

 

“근데 그 목도리 아직도 하고 다녀.”

 

 이번엔 목 안에서 사레가 들린 듯 쿨럭거리는 기침을 했다. 혜준은 여유롭게 소주 한 팩을 비웠다.

 

“이번 주 금요일에 갈치조림 먹으러 갈래? 청사 근처에 잘하는 데가 있는데.”

 

 혜준은 여름날의 그늘에서 나와 꿈꾸는 소년이 더 알고 싶어졌다. 자신이 찾아낸 좋아하는 것들을 소개해주고 싶었다. 계절마다 자신에게 심어 뿌리내리게 한 질문들에 대한 답도 주고 싶었다.

 

“갑자기?”

“친해지면 되지. 같이 식사를 할 만큼.”

 

 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 명함을 줬다. 기획재정부 국제금융과 이혜준 사무관. 유진도 웃으며 명함을 받았다. 난 명함 없어. 내 얼굴이 명함이거든. 시덥지 않은 장난에 혜준이 푸스스 웃었다.

 

 새로운 계절, 봄이었다.

 

 혜준과 유진의 유년이 만난다면,

 모두 충만한 삶을 살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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