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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전보를 울려줘요

Written By 보리

승전보를 울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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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유진은 유리잔을 가볍게 흔들며 와인 향에 집중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다른 곳에 자꾸 시선을 뺏기고 있었다.

 

 앞에 앉은 상대의 표정이 미묘하지만 분명히 아까와는 변해 있기 때문이었다. 나 국장이 이번 스무딩 오퍼레이션을 책임질 적임자라며 데려온 기획재정부의 이혜준 사무관. 분명 오피스에서 첫인사를 나눌 때 경직되어 있던 그 얼굴과 같은 사람이 분명하건만. 온몸에 갑옷처럼 둘러싸고 있던 긴장감은 어느새 사라져있었고 고개를 돌려 레스토랑 내부를 둘러보고 있는 모습은 어딘가 익숙한 듯, 심지어는 편해 보이기까지 했다.

 

 

 

 잠깐 업무 전화를 받고 온다며 나갔던 나 국장은 15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남아있는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더 길어졌다. 상대에게 있던 긴장감이 옮겨붙기라도 한 건지 유진은 타이트하게 매여있던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어 숨을 비워내곤 손목시계를 흘끗댔다. 그 몸짓의 서브텍스트를 눈치챘는지 이혜준은 잠깐 잊고 있던 것을 이제서야 상기했다는 듯 가벼운 투로 말했다. 나준표 국장님은 안 오실 거예요.

 

 

 

"급한 호출이 있으셔서 바로 세종으로 내려간다고 하셨거든요."

 

"…그 말을 언제 들었는데요?"

 

 

 

 이혜준 사무관은 전화를 받은 적도 없잖아요.

 

 나 국장이 자리를 비운 후로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던 정적의 상태로 줄곧 서로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대체 어느 틈에 연락을 받았다는 건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 유진의 눈썹 산이 높아졌다. 하지만 이혜준은 크게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그냥 알아요."

 

"……그냥 안다?"

 

"없으니까 더 낫지 않아요?"

 

 

 

 농담조가 섞인 혜준의 대답에 유진은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님을 직감했다. 정확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사무실에서 나 국장 옆에 앉아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던 부하직원과 지금 마주 보며 앉아있는 사람은 확실히 다르다고.

 

 

 

 심상치 않음을 느낀 유진이 의자에 기대고 있던 허리를 곧게 세우며 고쳐 앉았다. 얼굴 근육 역시 긴장감으로 굳어졌다. 워낙에 강한 인상이라 평소에 짓던 여유로운 표정을 지우면 적잖이 사나워 보일 것인데도 혜준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지금쯤인데…'라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유진이 반문하려는 순간, 잠시 다음 곡을 고르느라 멈춰있던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다시 시작됐다. 홀을 채우는 익숙한 음계에 말문이 막힌 유진의 반응을 뜯어보던 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나오네요, 비창 3악장."

 

"……"

 

"지사장님도 아시죠?"

 

 

 

 의문형을 갖추고 있었지만 물어보려는 의도가 아니라는걸, 이미 자신이 알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질문에 유진은 반사적으로 의자 위에 올려두고 있던 손을 움찔거렸다. 이 곡을 떠올리면 더 마음이 아파서 도저히 저 혼자는 못 듣겠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들어보고 싶었어요. 크지는 않지만 분명한 발음과 차분한 어투로 한 글자도 빠짐없이 들려오는 혜준의 말은 유진의 귀에 제대로 박혔지만 동시에 그 어느 하나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이 초면임에도 이혜준은 이 공간과 상황을 완전히 손에 쥐고 있었다.

 

 

 

 한유진은 이런 속수무책의 기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 직업을 선택하고 나서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기분. 들고 있는 패를 전부 읽히고 있는 무력감이 유진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혜준은 그런 유진을 지켜보며 차를 한번 홀짝였다. 즐기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지사장님, 좀 놀라신 거 같아요."

 

"이혜준 사무관. 이쯤에서 장난은 그만하는 게 좋겠는데요."

 

"방금 저 곡을 듣고 무슨 생각 했어요?"

 

"……"

 

"아무래도 어머님이겠죠?"

 

 

 

 결국 울컥한 유진이 사납게 와인잔을 테이블 위에 놓자 담겨있던 와인이 요동쳤다. 불쾌함을 견디지 못하고 유진이 몸을 일으켰고 의자가 뒤로 밀리면서 무거운 마찰음이 울렸다. 앉아있을 때는 눈높이라도 맞았지만, 완전히 선 상태에서 유진의 체격은 거대했고 위압감도 컸다. 그러나 작은 체구의 이혜준은 아랑곳 않고 그런 유진을 올려다보며 오히려 진정하라는 의미로 손바닥을 내보였다. 마치 커다란 반려동물을 능숙하게 다루는 것처럼.

 

 

 

"인정해요. 제가 짓궂었어요. 사과할게요."

 

"대한민국 공무원들 생각보다 대단하네요. 사람 뒷조사를 이렇게까지 하나?"

 

"그게 지사장님이 세운 가설이에요? 아쉽지만 저는 그 정도로 높은 직급은 안돼서요."

 

 

 

 이제는 화를 넘어서 아예 어이가 없어진 유진이 크게 실소하자 혜준이 따라서 눈꼬리를 접어 웃어 보인다.

 

 한유진은 당최 이게 무슨 전개인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와중에도 자신이 상대에게 완벽하게 모욕을 당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혜준의 이지러진 눈가를 보니, 어쩐지 불편함과 화 같은 것들은 이미 녹아버린 얼음처럼 느껴져 스스로가 우스웠다. 뭐야, 예상외의 모습에 지금 호감이라도 생겼다는 건가?

 

 본인이 생각해도 기가 차서 이마를 짚고 엄지로 눈썹을 슬슬 쓸면서 얼이 반쯤 나가있던 유진에게 혜준은 그러지 말고 앉아보라 했고, 잠시 망설이던 그는 결국 다시 몸을 굽혀 앉아 혜준과 시선을 맞췄다.

 

 

 

"정보의 불균형이라는 게 생각보다 재밌어서 장난이 심했어요. 그래도 봐줘야 돼요. 정보 흘리기는 그쪽한테 배운 거니까."

 

"…하나도 못 알아듣겠으니까, 설명을 해요."

 

"알려줘도 믿지 못할 텐데."

 

 

 

 Try me. 승부욕을 자극하는 혜준의 어조에 그대로 발끈한 유진이 상체를 끌어당기며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는 손짓을 하자 혜준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사장님, 잘 들어요. 딱 한 번만 얘기할 거니까. 사실 시간이 얼마 없거든요. 혜준의 거창한 인트로에 유진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손가락으로 훔쳤다. 흥미가 확 끓어오를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사실 지금 이건 내 과거의 기억에 기반한 꿈이에요. 우리는 2년쯤 전에 아까 그 사무실에서 스무딩 오퍼레이션에 대한 얘기를 하고 여기로 왔죠. 원래는 옆에 나준표 국장님이 계속 있었고요. 이번에도 그대로 뒀으면 국장님이 노래하는 걸 한 번 더 듣게 됐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나한테 고마워하는 게 맞아요."

 

"……"

 

"계속 말해도 돼요? 설명이 너무 빨랐나?"

 

"…그러니까, 지금 이 장소가. 이혜준 사무관의 꿈속이다?"

 

 

 

 유진이 한 단어, 한 단어 끊어 말하다가 결국 호흡 사이에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입으로 되읊으면서도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데 이혜준의 얼굴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변함없이 침착했다.

 

 

 

"엄연히 말하자면 꿈은 공간의 개념이라기보단 기억과 시간에 더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긴 한데… 편하게 말하자만 그렇죠."

 

"그리고 당신 말대로라면, 우린 이 대화를 전에도 했고?"

 

"아뇨, 그쪽에겐 처음이겠죠. 이건 지사장님의 현실이고 나에게만 꿈이니까."

 

 

 

 본인한테는 현실이라니, 반쪽짜리 인셉션이라는 건가? 혼란스러운 설정에 유진이 미간을 찡그리자 혜준이 검지로 자신의 턱을 톡톡 치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걸 어떻게 설명한담, 하는 이혜준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유진은 이제 농담은 그만 치우고 제대로 얘기해보라고 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음, 그러니까… 이 장소에서 그쪽과 만나는 상황은 내 입장에서 두 번째가 맞지만, 이 대화는 완전히 처음이라는 거예요. 서로 어떤 질문과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오가는 말이 당연히 달라지니까. 2년 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이런 꿈 얘기를 하진 않았거든요."

 

"그럼 그때는 무슨 대화를 했는데요?"

 

"지사장님이 나한테 대뜸 붉은색이 잘 어울릴 거라고 그랬죠. 난 분명 안 좋아한다고 했는데도."

 

 

 

 혹시 꿈은 내가 꾸고 있는 거 아냐? 유진은 이제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와인잔 사이의 시야로 혜준이 잠깐씩 겹쳐 포도주에 비쳐 보일 때, 그 말간 얼굴과 붉은색이 꽤 어울린다고 정말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일단 그렇다고 쳐요. 그럼 이건 당신의 꿈이자 기억이란 말인데. 왜 나는 처음이라는 거죠?"

 

"……"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이혜준 사무관에게는 과거의 기억인데 왜 나한텐 현실인 거냐고 묻는 겁니다."

 

 

 

 한유진은 최대한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단어를 골라가며 천천히 문장을 만들어갔고, 혜준은 유진과 마찬가지로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그의 느린 호흡을 성의껏 듣다가 유진의 반문에 입술을 꾹 여물며 몸을 조금 뒤로 뺐다. 상식적이지 않은 대화를 정말 논리적으로 설득이라도 하겠다는 듯 막힘없이 설명하던 이혜준의 침묵 사이에서 망설임과 찰나의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혜준은 약간 거리를 두고 유진을 응시하며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

 

 

 

 그거야, 네가 안 와서 내가 만나러 온 거니까.

 

 너무 작았던 중얼거림은 유진의 자리까지 온전히 전해지지 않았고, 제대로 듣지 못한 그가 뭐라고요? 되물어도 이미 혜준은 빠르게 화제를 전환해버렸다.

 

 

 

"그래도 대뜸 얘기하는 것보다 이렇게 풀어 말하니까 꽤 성실히 들어주네요. SF를 좋아해서 그런걸까?"

 

"…자꾸 내가 말해준 적 없는 나에 대한 정보를 얘기하지 말죠. 기분 이상하다고."

 

"아, 맞다."

 

"그리고 말도 돌리지 말고요."

 

"전부 얘기할 순 없어요. 이후에 다시 그쪽과 만날 원래의 이 사무관이 수습 가능한 선은 미래의 내가 지켜줘야 되니까."

 

 

 

 사무실에서 만났던 이혜준과 지금 눈앞의 상대가 전혀 동일 인물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사실이기에, 단순히 착각이라고 치부하고 혜준이 하는 이상한 말들을 가벼이 넘기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유진이 골몰해있는 사이 혜준이 슬슬 가야 할 것 같다며 외투를 챙겼다. 진짜인 건지 아님 이 상황을 모면하려는 건지. 유진은 가늘게 뜬 눈으로 일어설 채비를 하는 혜준을 응시했다.

 

 

 

"이렇게 간다고요."

 

"진심으로 나도 좀 더 오래 있고 싶지만, 꿈이라는 게 내가 더 꾸고 싶다고 억지로 이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끝까지 그 컨셉으로 밀고 가시겠다? 다음에 마주칠 때 어쩌려고 이런 무리수를 두지?"

 

"역시 안 믿는 거죠. 안타깝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업무 스트레스에 치였던 신입 사무관이 잠깐 헛소리했다고 칠 수 있지 않을까요?"

 

"내가 바보도 아니고."

 

 

 

 유진의 대답에 혜준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가볍게 웃었다. 아, 정말 이상하다. 자신이 다른 시간선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이 신입 공무원이 경계 없이 웃는 입꼬리만 봐도 자꾸 아까 마신 포도주가 확 올라오는 기분이 들어 유진은 어쩌면 정신이 이상한 건 본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건 아니겠지만, 지금 이 이상한 대화를 싹 잊을 만큼 화가 나서 나를 다시 만나러 오긴 하겠죠."

 

"내가 왜 화를 내요? 이 사무관이 허무한 이야기로 내 시간을 뺏었다고?"

 

"글쎄요, 두고 봐요."

 

 

 

 농담의 의도가 다분했던 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준이 여태껏 미미하게 담고 있던 웃음기를 전부 덜어낸 진중한 얼굴로 대답하자 살짝 올라가있던 유진의 입술도 금세 일자가 되었다. 혜준은 어느새 일어서서 앉아있는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경고하는 거라면 실패했는데. 난 이런 블러핑엔 익숙해서."

 

"겁주는 거 아니고, 응원하는 거예요."

 

"……"

 

"앞으로 나 때문에 당신이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잘 기억하라고."

 

 

 

 각오 단단히 해요.

 

 응원이라고 하기엔 너무 단호해서 어쩐지 확인을 받아내는 듯한 마지막 말을 끝으로 혜준은 몸을 돌려 레스토랑 홀을 가로질러 나갔다.

 

 한유진은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끈질긴 시선으로 쫓았다. 두고 보라는 문장 끝에 방점을 찍듯, 유진의 동공을 꼼꼼히 살피던 혜준의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꽤 긴장을 하고 있었다는걸. 품이 깊은 의자에 상체를 뒤로 기대며 숨을 내쉴 때 명치끝이 저려오는 것으로 뒤늦게 깨달았다.

 

 

 

 

 

-

 

 

 

 

 

 저절로 눈이 떠진 이혜준은 상체를 일으키자마자 탁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켜고 요일과 시간을 확인했다. 토요일, 오후 4시 37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수면 시간을 체크한 다음 순서는 포털 앱을 켜 익숙한 이름을 검색하는 것. '바하마 코리아 전 지사장 유진 한, 뉴욕에서 피살된 것으로 확인되어'라는 제목의 기사가 가장 상단에 뜨는 것을 보고서야 혜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간소한 루틴을 마치고, 이혜준은 몽롱한 머리를 깨우기 위해 커피를 내리기로 했다.

 

 

 

 어제부로 이혜준이 꿈을 꾸기 시작한 지 딱 4개월이 지났다. 그것은 한유진이 죽은 지도 벌써 4개월이 흘렀단 말과 같다.

 

 한유진은 이혜준과의 마지막 통화를 마치고 외국으로의 망명 대신 한국에 남아 자수를 선택했고, 1년에 걸친 재판 과정 동안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진마리를 통해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 들은 이혜준은 한유진의 그 선택이 더 이상 숨어살지 않겠다는 자기 구제를 위한 행동이었는지, 혹은 그가 뱉었던 '찾아갈게요'라는 말을 지키려는 첫 단계인지 고민했지만 그 둘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찾아가겠다는 말은 뱉어질 땐 화자의 고백 같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청자의 기다림으로 바뀌는 이상한 성질을 가진 문장이었다.

 

 은행 매각이나 신용등급 하향 같은 사건사고를 정신없이 터뜨리는 와중에도 애처럼 혜준의 반응을 갈구할 땐, 그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동질감 때문에 이끌렸고 동시에 위험하다는 판단으로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뒤섞여있던 혜준의 감정들은 오히려 그와 마주하지 않는 공백기를 거치며 일부는 가라앉고 어떤 것들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중 가장 분명한 것은, 이혜준은 찾아오겠다는 한유진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냥 뱉었을지도 모를 말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새끼손가락을 걸었던 것이다.

 

 거리를 두고 나서 더 커져버린 마음이라니.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일단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는 자각을 하지 않은 채 열심히 일해 시간을 흘려버리는 것뿐이었다.

 

 

 

 당연히 이혜준은 한유진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당연히,라는 말이 민망하지만 솔직히 그러고 싶었다. 기다리고 있다는 내색을 보이기 싫었다. 인터뷰를 했을 당시 그가 마리에게 건네주었다는 명함에는 그의 한국, 미국 연락처와 메일 주소까지 기재되어 있었고 혜준은 유진이 어느 구치소에 있는지까지 알고 있었지만 아무 정보도 모르는 사람보다도 더 무관심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출소 후의 유진이 먼저 연락을 취해올 거라는 당연하고도 근거 없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구치소에서 지낸 1년이 흐르고, 재판이 끝나 벌금형과 집행유예를 받아 출소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지 6개월이 더 지났을 때 이혜준은 서서히 인정하기로 했다. 어쩌면 한유진의 선택이 자신에게 찾아오겠다는 것과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강해지겠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을 수 있다. 어쩌면 자신의 과거를 수치스러워할 줄 알게 되었을 수 있다. 혹은 그보다 아주 간단하게, 한유진은 이혜준을 더 이상……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관계의 마무리를 생각하기 시작하자 이것도 이별이라면 이별인 건지 혜준의 불면은 점점 심해졌다. 잠을 청하기 위해 술을 찾는 일이 잦아졌고 그날도 마찬가지로 혼자 맥주 두어 캔을 마시고도 몇 시간을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던 밤이었다.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이라 설정한 알람도 없던 핸드폰이 거듭 울렸다.

 

 

 

-혜준아, 혜준아… 어떡하니. 이거 어떡하니. 어떻게 해, 혜준아……

 

 

 

 잦은 생방송 경험으로 좀처럼 목소리를 떠는 법이 없는 마리의 호흡이 스피커 너머에서 속절없이 흔들렸고 정보 값이 하나도 없는 중얼거림에도 이혜준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즉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산 거예요?

 

 그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어 속으로 몇 번을 읊으며 연습했지만 막상 꿈속에선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면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일단 이혜준이, 한유진이 살아있는 것을 진심으로 원했다.

 

 

 

 맨하튼에 있던 한유진이 보복성 총기 사고로 죽은 지는 이미 3주가 더 지나있었다.

 

 해외 자본 투자 기업 관련 취재를 하고 있던 마리의 선배가 바하마 측에 컨택하면서 알게 된 사실을 마리가 술자리에서 듣자마자 전화로 알렸던 것이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바하마에 있을 당시 벌려놓았던 일들을 무리해서 급하게 정리하고 국내로 돌아오려고 했으며, 이미 한국에서의 자백으로 본사와 VIP 클라이언트들의 눈 밖에 난 그를 내부고발자로 취급하여 더 손실을 보기 전에 손을 쓴 것 같다고. 최대한 더 자세히 알아보겠다는 마리의 말이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국내 포털 사이트에서는 검색을 해도 아주 짧은 기사로 밖에 나오질 않아, 결국 혜준은 구글에서 그의 죽음에 대한 모든 기사를 찾아 사고가 일어난 시간과 장소를 알아내야 했다. 눈앞에서 총상을 입는 것을 똑똑히 봤기 때문일까. 상황을 단지 활자로 읽었을 뿐인데 온몸이 날카로운 총성으로 찢기는 듯했던 그날의 기억이 생경하게 떠올랐고 이혜준은 그대로 일주일을 가까이 앓았다.

 

 낮이면 몸이 차게 식어 오한이 들었고, 밤이면 열이 끓어올라 손가락 끝까지 땀에 젖었다. 병가를 내고 며칠을 누워있는 동안 시간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혜준의 입에선 제대로 맺지 못하는 문장들만 흘러나왔다. 이대로라면 정말 큰일 나겠다며 입원을 강권하는 마리와 고모를 고집스럽게 보낸 날, 그러니까 한유진이 뉴욕의 인적 드문 골목에서 싸늘하게 식어갔다던 그날로부터 딱 한 달 되던 밤. 이혜준은 한유진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말 꿈인 줄만 알았다.

 

 이미 며칠을 고열에 시달리느라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더 길었으니까. 게다가 꿈속의 혜준은 고모부를 찾아가 면회를 했다는 한유진에게 따져 묻기 위해 그의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건 혜준이 명백하게 기억하는 그와 자신의 과거였으니, 그리움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생각했다.

 

 

 

 혜준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인기척에 모니터를 보고 있던 유진이 시선을 들어 올려 혜준의 얼굴을 확인하곤 반가운 기색을 하나도 숨기지 않은 채 의자에서 일어났고, 반대로 혜준은 다리에 힘이 풀려 무너지듯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갑작스러운 눈물에 깜짝 놀라 급하게 책상을 돌아 걸어온 유진이 혜준 앞에서 무릎을 굽혀 팔뚝을 붙잡고 일으키자, 혜준은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훔칠 새도 없이 유진의 수트 옷깃을 붙잡았다. 흐느낌 때문에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멋대로 토막나 흘러나왔다.

 

 

 

"강해지겠다면서. 아니, 안 무너지겠다면서요."

 

 

 

 왜 그렇게 서둘렀던 거냐고, 뭐가 그렇게 급해서 무리했냐며 화내고 싶었지만 그의 무소식이 점점 길어지면서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질책하기엔 자격 미달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이혜준은 자꾸만 속내를 삼켰다.

 

 대뜸 와서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이 사무관. 왜 멱살을 잡고… 설마 저번에 그거 복수하는 거예요? 꽤 강한 악력으로 옷깃을 잡힌 유진이 당황스럽지만 못내 즐겁다는 표정으로 삐져나오는 웃음과 함께 농담을 치자 이혜준은 지금 우스갯소리가 나와? 소리치고 싶은 답답함에 아예 눈가를 짓누르며 더 크게 엉엉 울어버렸다.

 

 

 

 혜준의 키에 맞춰 어정쩡하게 무릎을 굽힌 유진이 혜준을 어떻게 다독여야 할지 몰라 한참을 굳어있다가 결국 호흡이 부족해 딸꾹질을 시작하는 혜준을 슬슬 뒤로 이끌어 소파 팔걸이에 앉혔다. 티슈를 가져오려고 책상에 손을 뻗었지만 잡고 있는 유진의 멱살을 풀어줄 생각이 없는지 실핏줄이 도드라지도록 꽉 쥔 혜준의 손을 한번 내려다보고는 한유진은 결국 소파보다 낮은 테이블에 걸터 앉아 앉은키를 낮추고 혜준을 마주봤다.

 

 

 

"내가 진수호 씨한테 찾아간 게 그렇게 싫었어요?"

 

"……"

 

"혹시 자존심이 상했나?"

 

"……"

 

"이혜준 사무관이 모르길 바랐다는 거짓말은 안 할게요. 사실 이렇게 찾아와주길 기다렸으니까. 울 정도로 질색할 줄은 몰랐지만."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행동까지. 자신이 너무 잘 알던 한유진 그대로였다.

 

 꿈이 이렇게까지 생생할 건 또 뭐야? 그의 부고 소식을 듣고 온몸으로 슬픔을 앓는 동안 울 기운조차 없었던 혜준은 뒤늦게서야 터진 눈물을 그 앞에서 다 쏟아냈고 한유진은 그런 이혜준을 기다렸다. 건네는 위로의 말도, 혹은 손짓도 없었다. 그저 혜준에게 붙잡혀있는 옷깃 아래로 들숨과 날숨이 그대로 느껴질 만큼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 있었을 뿐인데, 이혜준에겐 그게 무엇보다 더 안정감을 주었다.

-

 

 

 

 

 

 그리고 그게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잠에서 깨고 나니 며칠을 앓았던 열병은 씻은 듯 사라져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목소리는 반쯤 나가있었다. 고모나 마리가 와도 세 마디 이상을 하지 않고 줄곧 입을 닫고 있었는데 두어 시간은 소리친 것처럼 목이 쉬었고 후두가 따끔거렸다. 일주일간 말을 했던 기억이라곤 꿈에서 유진을 만나 체면도 없이 엉엉 울어버렸던 게 전부였는데.

 

 

 

 이혜준은 가벼워진 몸으로 일어나 노트북을 키고, 검색창에 바하마와 한유진의 이름을 이어 타이핑했다. 그의 죽음을 대번에 확인시켜주는 기사의 헤드라이트를 클릭하고 본문을 꼼꼼히 읽다가 스크린에 가까이 숙이고 있던 상체에 힘이 쭉 빠져 의자 등받이에 툭 기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지가 않아서 검지로 그어가며 문장을 곱씹어 봐도 분명했다. 날짜는 동일했지만, 한유진이 죽은 시간과 장소가 처음과 달라져있었다.

 

 

 

 이혜준은 상상력이 풍부한 편은 아니었다. 문학이나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세무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며 번 돈으로 대학 공부와 공시 준비를 병행했던 몇 년을 보내고 나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대신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 강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뭐라도 할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내 의지로 이뤄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그것은 어떤 면에선 긍정적인 미래에 대한 상상력과 다르지 않았다.

 

 이혜준은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여 이런 초현실적인 상황을 아주 빠르게 받아들여 믿었다. 꿈을 통해서 그의 과거로 찾아가는 것인지, 혹은 자신의 꿈과 그의 과거가 어떤 교점에서 마주치는 것인지는 자신도 정확히 알 수가 없어 이 현상을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혜준이 꿈속에서 과거의 한유진과 대면하면, 현재에 그 영향이 미친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다음을 기다릴 충분한 이유가 됐다.

 

 

 

 주기는 제멋대로였다. 이 주 만에 다시 그를 만나기도 했고, 한 달이 넘어서 꿈이 찾아온 적도 있었다.

 

 어느 날은 출근을 위한 알람 소리 때문에 깨기도 했고, 다른 날은 금요일 저녁에 잠들어 깨어나니 일요일 새벽 4시일 적도 있었다. 오래 대화를 한 날이 그랬다. 직장인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토요일을 몽땅 뺏겼던 그날, 이혜준은 한유진과 소주팩을 사이에 두고 벤치에 앉아 그가 브루클린에 살던 시절을 들었다. 꿈속이란 걸 자각하고 보니 이미 잔뜩 삐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다가 홱 몸을 돌려 등을 보이고 도망가려는 한유진을 이혜준이 '남의 술은 왜 다 먹고 그냥 가요?'라며 소리쳐 불러 세워 다시 앉혔던 것이다.

 

 

 

 타인에게 한 번도 얘기해 본 적 없는 이야기라며 망설이던 그의 말문은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으로 트였다. 피아노 위에서 가장 자유로웠지만 줄곧 빨랫감을 놓지 못하고 살았던 어머니의 손. 아침마다 울리는 세탁기 소리로 몸에 익어버린 기상 시간. 뮤지컬 오디션을 보고 합격 발표를 들은 날, 빨리 소식을 전하려고 한달음에 뛰어온 세탁소에서 목격했던 지옥. 그때부터 결심했던 삶에 대한 태도, 그런 것들.

 

 그러면 혜준은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동안 짓는 처음 보는 표정 같은 것에 집중했다. 그와 마주했던 순간마다 표면적으로 드러내야 했던 경계심 때문에 제대로 보지 않았던 것들을 이번에는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유진이 말을 잇기를 망설이며 입 안쪽을 씹을 때마다 홀쭉해지는 볼과 드러나는 광대를 손으로 쓸고 싶은 걸 몇 번이고 참으면서.

 

 

 

 이혜준은 그렇게 한유진을 다시 만나러 갔다. 다짜고짜 멱살도 잡히고, 갈치조림을 먹으러 가자는 어이없는 데이트 제안도 받으러. 상황은 반복이었지만 앞으로 그가 자신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있는 이혜준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혜준의 꿈이 쌓일 때마다 그와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이 혼자만의 친밀감이고, 눈을 뜨고 나면 유진은 세상에 없는 존재라는 게 참 애석했다.

 

 

 

 그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사람을 잃고 아파하는지를, 모두에게 이런 기회가 다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혜준은 그중에서도 운이 좋았다. 한유진은 어떻고? 그는 정말 운을 타고난 인생이라고 밖에는 못할 것이다. 죽어있는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역설적이긴 하지만 그는 이혜준이 시간을 거슬러 달려서 찾아가는 대상이 되었다. 이보다 더 큰 운이 어디 있겠어. 이혜준은 가끔 그런 뻔뻔한 생각을 하며 틈만 보이면 자꾸만 찾아드는 슬픔을 열심히 몰아냈다.

 

 나는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러니까 한유진 씨, 꼭 살아줘요.

 

 살아서 내가 이겼다고 승전보를 울려줘요.

 

 

 

 

 

-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그러니까 과거의 유진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혜준은 자연스럽게 이 현상에 대한 몇 가지 규칙을 터득하게 되었다.

 

 특정한 과거를 지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로지 한유진과 이혜준이 마주 보고 있었던 순간들에 한정되어 랜덤으로 꿈의 시점이 선택됐고, 한번 돌아간 과거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꿈에 나온 장소가 한 번도 겹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혜준은 자신과 그가 몇 번이나 만났는지 세어보고는 좀 놀랐다. 두 번의 전화 통화와 일곱 번의 만남.

 

 나 지금 일곱 번 만난 사람 되찾겠다고 이러는 거야? 고작 일곱 번 만난 나한테 인생을 건 한유진은 또 뭐야?

 

 

 

 그를 만날 기회가 생각보다 얼마 없음을 깨달은 혜준은 조금 더 신중해지기로 했다. 매 순간에 충실하고, 솔직하기로.

 

 두 번째 꿈까지만 해도 마음이 급했던 이혜준은 한유진을 붙잡고 다짜고짜 날짜와 시간을 읊으며 그의 사고를 미리 언질 해주었다. 하지만 그런 혜준의 말에 유진은 당황하면서 이미 목숨의 위협은 많이 받아봤다는 나이브한 대답만 할 뿐이었다. 절대 농담일 수가 없는 얼굴로 제발 조심해달라고 약속을 받아냈으나 꿈에서 깨고 돌아오면 언제나 그대로였다. 천기누설도 소용이 없구나. 정말, 죽어도 말 안 듣지. 생각하다가 죽어도,라는 단어에 혼자 움찔하곤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어쨌든 혜준의 의지로 꾸는 꿈속의 일이기에 세부적인 것들은 꿈의 주체가 마음먹는 대로 바뀌곤 했다. 이를테면, 이 점을 활용하여 혜준은 그와의 처음 만났던 레스토랑에서 나 국장을 치워버리고 비창 3악장을 같이 들을 수 있었다.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이혜준은 아주 빠르게 생기를 되찾아갔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얘기하는 아주 작은 확률에 자신을 걸어 차근차근 이뤄낸 인생을 살아온 이혜준은, 실낱같은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빛을 보고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혜준을 부지런히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의 비보를 듣고 나서 이례적으로 긴 병가를 쓰고 난 후 회사로 돌아간 혜준은 빠르게 업무 집중도를 회복했고 금방 일 욕심 많은 이 사무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퇴근 후 집에 와서는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꿈과 꿈 사이의 불규칙한 주기마다 이 기이한 상황에 대해 성실히 탐구했다. 낮엔 공무원, 밤엔 출동을 기다리는 5분 대기조 히어로. 이 사무관의 아찔한 사생활이었다.

 

 

 

 이혜준은 이 현상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이 의아하지는 않았다. 한유진의 입에서 들은 그의 인생을 돌이켜보건대, 그의 생사에 이만큼의 관심을 쏟을 사람은 이제는 기억을 모두 잃었을지도 모르는 그의 어머니와 자신뿐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혜준이 한유진 때문에 이런 일을 겪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건 기쁜 일이었지만, 가끔은 당연히 외롭기도 했다. 내가 지금 그쪽을 위해 어떤 일을 겪고 있는 줄 알아요? 나는 시간을 거슬러 당신을 만나러 가고, 이건 여권을 버리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일이라구요.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그 대상이 없다는 것이.

 

 

 

 

 

-

 

 

 

 

 

 더 정확하게 얘기해야 할 것이다. 이혜준이 은밀한 꿈은 혼자만의 비밀은 아니었다.

 

 마리는 혜준이 두 번째 꿈을 꾸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이상하다는 눈치를 챘다. 혜준이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진마리가 이혜준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숨기고 있는 것을 털어놓으라 했고, 솔직하게 답을 해준 것뿐이었다. 혜준이 한유진의 사고 소식을 알고도 이렇게까지 금방 일상생활로 복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진마리는 두 가지 가설을 세워서 혜준을 다그쳤다. 첫 번째는 이혜준이 한유진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고, 두 번째는 이혜준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

 

 

 

 그게 그거 아니야? 마리의 두 가설을 모두 듣고 혜준이 가볍게 대꾸하자 마리가 '그래! 바로 이런 태연함! 이게 말이 안 된다고, 이게. 미친 거 아니고서야!'라며 펄쩍 뛰자 결국 혜준은 마리를 앉혀두고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차분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누군가에게 풀어낼 일이 이렇게나 빨리 생길 줄은 몰랐던 혜준은 이 형이상학적인 사건을 최대한 말이 되게끔 설명하기 위해 애썼고, 긴 설명을 한 번도 끊지 않고 경청하던 마리가 보인 첫 반응을 혜준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네 말대로라면 유진 한은 지금까지 두 번 더 죽은 거네?"

 

"……"

 

"아, 미안."

 

 

 

 이 상황을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 이런 시각으론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던 혜준의 머릿속이 띵, 울렸다.

 

 

 

"너 정말 기자가 천직이구나, 마리야. 팩트부터 짚네……"

 

"아닌가? 따지고 보면 유진 한의 시간은 이미 멈춰있는 거잖아. 그 사람 입장에선 이게 반복되는 건지도 모르고."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말이 없는 혜준을 앞에 두고 마리는 손사래를 쳤다.

 

 

 

"그래, 이건 중요한 게 아니다. 어차피 현재에 없는 사람인데. 내가 궁금한 건 자꾸 과거의 망령을 만나러 가는 네가 괜찮으냐야."

 

"…난 괜찮아."

 

"그럴 수가 있어?"

 

"그래, 솔직히 괜찮은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대수는 아니니까. 네 말대로 현재에 없는 사람도 있는데."

 

 

 

 혜준의 대답에 마리는 입을 꾹 닫았다.

 

 마리는 그 후로도 자주 혜준의 집에 들러 함께 저녁을 먹으며 최근의 진행 상황을 들어주었고 혜준은 그런 마리가 너무나 고마웠다. 이혜준의 아찔한 사생활은 기획재정부 공무원이라는 현실과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가끔은 스스로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밀려올 때가 있었는데, 제3자인 마리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이 모든 게 자신만의 상상이 아니라는 일종의 확인을 받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둘 다 주말을 맞아 늦게까지 술을 마셨던 금요일 밤, 혜준은 내내 묻고 싶었지만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마리야,

 

 

 

"내 말을 어떻게 믿어?"

 

"무슨 소리야?"

 

"보면 알아. 내 기분 맞춰주느라 그러는 거 아니잖아. 어떻게 그래? 솔직히 내가 맨날 꿈꾸고 나서 기록하는 것들? 그거 사실 혼자 지어내서 썼다고 해도 이상할 거 없잖아."

 

"얘 취했구만."

 

"들어봐. 나는 매번 꿈에서 깨면 한유진의 사고 시간이 조금씩 달라졌다는 걸 알지만, 너한텐 아니라며. 원래 알던 사건 정보랑 같다면서."

 

"그래, 그렇지. 나한테는. 근데 이혜준아. 너는 우리 엄마랑 내가 맨날 우리 아빠 이젠 정신 차릴 거라고 너한테 돈 빌려달라고 할 때 정말 믿었어?"

 

"……"

 

"그냥 네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거겠거니, 하는 거지."

 

 

 

 네가 지금 그렇게 믿고 있잖아. 그럼 나도 믿어야지. 별 수 있냐?

 

 그렇게 말하는 마리를 보며 낯선 세상에 혼자 똑떨어져 있다는 기분이 들 때 아무 사족도 없이 믿음을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라고, 이혜준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한유진에게도 아군이 필요해. 그가 돌아올 수 있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같은 편.

 

 

 

"그래, 안 말린다. 유진 한인지 뭔지 그 사람 한 많은 망령되기 전에 자본주의에 영혼 팔았던 시절에도 구제해 줄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었어."

 

"…나보고 미쳤다고 하지 않아줘서 고마워."

 

"응, 앞으로도 생각으로만 할게."

 

"…고맙다는 식상한 말 말고, 뭐 없나."

 

"응, 뭐 없어."

 

 

 

 지치지만 마. 마리의 응원에 혜준은 다짐을 하듯 고개를 꾹꾹 눌러 주억거렸다.

-

 언젠가 이 날이 찾아올 걸 알고 있었는데도, 긴장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꿈을 꾸는 회차가 늘어남에 비례해서 돌아갈 수 있는 과거의 순간들도 줄어들었다.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분명하게 어디로 갈지 알 수 있었다. 혜준의 계산이 맞다면 이게 곧 마지막 꿈이었기 때문이다. 돌아갈 선택지가 하나씩 줄 때마다 이 순간이 오기를 바라기도, 바라지 않기도 했다.

 

 

 

 어느새 병원 복도를 걸어와 반쯤 열려있는 문 앞에 선 혜준의 손에는 노란 장미가 들려있었다. 사실은 그때 사 가고 싶어서 병원 안에 있던 꽃집을 몇 분이나 서성였었지. 결국엔 빈손으로 찾아갔지만. 이혜준은 언젠가 한유진이 자신을 불러냈던 카페 테이블에 작위적으로 놓여있던 노란 장미의 꽃말을 알고 있었다. 완전한 성취. 유진이 혜준과 처음 사적으로 대면하면서 둘 사이에 놓아뒀던 그 주문이, 지금 이혜준에게도 필요했다.

 

 

 

 뒤를 돌아 창밖을 보고 있던 그가 유리에 비친 혜준의 인영을 알아봤는지 어머니와의 전화를 서둘러 끊었다. 올라갔다 내려가는 유진의 등을 대뜸 끌어안지 않기 위해서 혜준은 땅에 디딘 발에 힘을 줘야만 했다.

 

 한유진은 이번에도 묻지 않은 이야기를 줄줄 풀어냈고 혜준은 그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할 때 나오는 어린 표정과 얼굴의 골격, 근육의 움직임 같은 것들을 유심히 눈에 담았다. 이렇게 보는 것도 마지막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시선이 곧 기록이 되길 바라며 최대한 자세히 새겨 넣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애틋하다가도 '뉴욕에는 나를 죽이려는 놈들이 제법 있거든요'라는 말을 하며 가볍게 웃는 유진의 껄렁함에 혜준은 손에 쥔 꽃다발을 그의 머리에 무참히 내리치며 정신 차리라고 따끔히 혼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손에 힘을 주느라 꽃이 잘게 떨리자, 그제서야 유진의 시선이 노란 장미로 향했다. 그는 정말 기뻤는지 비집고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나 주려고 산 거예요?"

 

"네."

 

"왜? 누구 때문에 죽었을까 봐?"

 

 

 

 진짜 저 반질한 이마 딱 한 대만 치면 안 되겠지. 혜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본인이 부리는 허세가 얼마나 하릴없으며 누군가에게 비수가 되어 꽂히는지 알 리가 없는 철없는 남자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가 주고 싶어서 샀어요. 안 그러면 후회할까 봐."

 

"…나를 의식하기 시작했단 말로 들리는데요."

 

"잘 들었네요, 그 말 맞으니까."

 

 

 

 옛날 같았으면 헛소리 말라고 가시를 세웠겠지만 지금의 이혜준에게 이 정도의 떠보기는 우스웠다. 마음을 인정하고 내보이는 거? 할 수만 있다면 한유진이 수감되어 있을 때, 아님 미국에서 혼자 지내고 있을 때라도 고집을 꺾고 명함에 적힌 연락처로 한마디 안부라도 물을 걸 얼마나 애를 태웠는데. 그런 건 대수롭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유진의 입장에선 혜준의 빠른 수긍이 당황스러웠다. 총을 맞은 게 생각보다 임팩트가 컸나?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던 유진의 얼굴에 빠르게 당혹감이 스며들자 혜준이 때를 놓치지 않고 성큼 걸어와 유진의 커다란 상체에 참 어울리지 않는 노란 장미 다발을 일방적으로 안겼다.

 

 

 

"꽃말, 알아요?"

 

"…뭔데요?"

 

"완벽한 성취."

 

"……"

 

"나는 꼭 이길 거니까요. 그래서 미리 자축하려고 가져왔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게끔 설명해봐요."

 

 

 

 이제는 다시 올 수 없을지도 모를 이 혼자만의 여행을 끝내고, 당신을 데려갈 거라고.

 

 과연 마지막 꿈속에서 한유진에게 그가 맞게 될 미래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 것이 옳은 판단일까? 이혜준은 아직도 망설여졌다. 하지만 이건 이혜준의 꿈이기도 했지만, 한유진의 과거이기도 했다. 그러니 결국 잠에서 깨고 났을 때 결과가 달라지기 위해서는 유진의 의지도 필요한 것이다. 구치소 수감 후 미국으로 돌아가 상황을 정리하던 약 2년의 시간은 혜준이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었고 오로지 그 혼자만이 스스로를 구해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혜준은 한유진이 그 시간 동안 불안하지 않게, 성급한 마음을 먹지 않고 차근히 돌아올 준비를 할 수 있게 그에게 믿음을 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조금 늦게 돌아와도 여전히 뻗은 손을 거두지 않을 거라는 걸 알려줘야 했다. 우리의 공백에 속절없이 깊어지는 마음 때문에 초조해진 건 너뿐만이 아니라고. 나 역시 매일같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이혜준은 이미 표면장력을 한참 넘어버린 마음을 눌러 담느라 숨을 두어 번 깊게 들이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쪽이 곧 미국으로 돌아가면 할 일."

 

"……"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내 입장에선 좋지 않은 일이겠죠. 그러니까 나는 최선을 다해 싸울 거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이혜준이, 나를 막겠다고?"

 

 

 

 한유진은 저런 히어로 영화에서나 빌런이 할법한 말들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소화해내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상체를 뒤로 조금 젖히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혜준의 말이 꽤 흥미롭다는 듯 보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향하는 총을 몸으로 막다가 병원 신세나 지고 얼마 후엔 새 국적도 포기할 것을 알고 있는 이혜준의 입장에서 그의 속내는 투명하기 그지없었다. 돌이 던져진 호수처럼 잘게 이는 파동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겁먹었나 봐요.

 

 혜준의 말에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보호장비처럼 지니고 있던 유진의 옅은 미소가 결국 완전히 사라졌다. 유진은 엉겁결에 받아들었던 꽃을 침대 위에 올려놓고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혜준을 응시했고, 이혜준도 그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으며 그대로 받아냈다.

 

 

 

"내가 정말 이혜준 사무관을 곤란하게 하면?"

 

"상관없어요. 내가 더 열심히 해서 이기면 되니까."

 

"대한민국 경제 공무원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적어도 무너뜨리는 것보다는 지키는 일이 가치 있겠죠."

 

"…아쉽네. 만약 오늘 이 사무관이 날 찾아온다면 괜찮은 제안을 하려고 했는데."

 

 

 

 물어볼 필요도 없이 이미 거절을 들은 것 같네요.

 

 분명히 속이 꽤 상해 보이는 말투로 대꾸하며 유진이 몸을 돌려 침대 안쪽으로 고쳐 앉아 시선을 피하려고 했지만, 혜준의 손이 더 빨랐다. 마음이 너무 앞섰는지 약간의 의도가 있었던 건지, 그만 총상을 드레싱한지 얼마 안 된 오른쪽 팔뚝을 잡아버렸고 유진은 갑자기 몰려오는 고통에 체면 불고하고 신음을 흘리며 잔뜩 커진 눈으로 혜준을 쳐다봤으나 이혜준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유진을 몰아세웠다.

 

 

 

"그럼 대신 내가 제안할게요. 들어볼래요? 분명 흥미로울건데."

 

"저기, 이 손 좀. 이봐요, 지금 어딜 잡고 있는지 알아요?"

 

"만약에, 만약에요. 그렇게 실컷 못된 짓 하다가 본인도 지치는 때가 올 수도 있잖아요. 아니, 올 거예요. 그럼 그때는 망설이지 말고 꼭 뒤돌아봐요."

 

"알겠으니까, 일단 이것 좀 놔주면…"

 

"나는, 나를 무너뜨리지 않고 당신에게 다가가 볼 수 있으니까."

 

"……"

 

"나는 그럴 거니까. 한유진 씨는 다 무너뜨리고 오라구요."

 

 

 

 강하게 잡혀있던 팔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던 남자가 혜준에게서 나온 낯선 호칭에 놀라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이혜준은 앞에 불편하게 앉아서 자신을 살피는 그의 시선에서 잠시 벗어나려고 고개를 약간 숙였다.

 

 아무리 그래도 꿈인데, 그의 입술 사이로 뱉어지는 숨마저 느껴지는 생생함이라니. 혜준은 벌써부터 이 꿈에서 깼을 때도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스스로가 과연 괜찮을지 걱정이 됐다. 혜준은 서서히 손에 힘을 풀고 뒤로 물러나며 다시 거리를 유지했다. 아직 얼굴을 들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혜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충분히 느끼며 끊겼던 말을 마저 이어갔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

 

"나는, 한유진 씨를 기다릴 거라는 말이에요. 그쪽이 망해도 상관없이."

 

"당연히 상관없겠죠. 내가 망하는 게 이 나라 공무원들이 바라는 바 아닌가?"

 

"……"

 

"…오늘 이 사무관이 하는 말들은 전부 이해가 잘 안되네요. 내가 뭔갈 놓치고 있는 것 같아요."

 

"……"

 

"이혜준이 기다린다고? 듣기 좋은 말에 반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 여기 찾아온 건 이혜준 사무관이잖아요.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기다린 건 나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기다렸다는 말에, 여태껏 꾹꾹 누르며 간신히 감추고 있던 감정이 갑작스럽게 차올랐다.

 

 아, 울면 빨리 깨는데. 이혜준은 황급히 고개를 들어 눈물이 흐르지 않게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내려 천으로 몇 번 감싼 상처를 덮고 있는 얇은 병원복을 물끄러미 보다가 오른쪽 어깨 위로 손을 가볍게 얹었다. 혜준의 손바닥 아래로 그의 몸이 긴장한 것이 전해졌다. 맨 처음 꿨던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유진의 몸이 내쉬는 숨에 따라 팽창했다가 수축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자 혜준의 시끄럽던 속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함께 있는 것보다 더 확실한 위안은 정말 없구나.

 

 

 

"그래서 지금 제안하잖아요. 나도 그럴게요.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

 

"나한테로 와요."

 

 

 

 이 말을 꼭 되돌려주고 싶었다.

 

 멋 없이 연봉의 가치니 뭐니, 숫자의 질서를 들먹이지 않고 훨씬 근사한 방법으로.

 

 만약 이 꿈이 끝나고 잠에서 깼을 때 그가 돌아오지 못한대도, 후회는 하지 않을 거라고 이혜준은 생각했다.

 

 

 

 

 

-

 

 

 

 

 

 혜준을 꿈에서 끌어올린 건 주중이면 한결같이 오전 7시에 울리는 알람 소리가 아니라, 착신 전화를 알리는 기본 벨 소리였다.

 

 꼭두새벽 같은 아침에 걸려온 전화로 마지막일지도 모를 꿈에서 강제로 깼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지만 그보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혜준에게 연락할만한 사람은 마리나 고모 둘뿐이라는 걸 알아서, 혜준은 직전에 끝나버린 꿈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침대 주변을 더듬어 핸드폰을 손에 쥐었고 잠금 화면을 풀어 귀에 가져다 가만 대었다. 잠길 대로 잠겨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아 목을 가다듬으려는데, 스피커 너머의 발신자가 먼저 침묵을 깼다.

 

 

 

-Hello, Stranger.

 

 

 

 잠에 취해 감겨있던 혜준의 눈이 단박에 떠졌다. 들려온 목소리는 너무나 잘 아는, 정말로 그리워했던 그것이었는데, 이게 현실인지 파악하는데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혜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고, 눈꺼풀이 닫혔다 열릴 때마다 눈물이 새로이 차올랐다.

 

 

 

-이혜준?

 

 

 

 답이 없는 상대를 재차 확인하기 위해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혜준은 그제서야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정말 한유진이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장난 좀 쳐봤는데. 놀랐어요?

 

"……한유진 씨."

 

-네.

 

 

 

 부르니까, 답한다.

 

 혜준은 그의 이름을 두어 번은 더 중얼거렸고 유진은 왜 그러냐고 묻지 않고 똑같이 네,라고 거듭 대답을 들려주었다.

 

 

 

"진짜 한유진이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진짜 이혜준이네요. 부재중 통화 기록 보고 내가 꿈을 꾸나 했어요.

 

"…내가 전화를 걸었어요?"

 

-여기 시간으로 오후 4시 32분에. 거긴 새벽 5시 반이었을 텐데. 미팅 끝나고 확인해보니까 전화가 와있어서 깜짝 놀랐잖아요. 이혜준이 이 시간에 나한테 먼저 전화를 했다고? 그러면서.

 

 

 

 무슨 일 있나 걱정도 되고요. 유진이 뒷말을 조금 흐렸다.

 

 6개월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일곱 번의 꿈을 꾸며 혼자 과거로 돌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한유진을 마주했던 이혜준의 노력은 결국 그에겐 한 번의 부재중 기록으로 남는 걸까? 그렇다고 해도 혜준은 억울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7전 6패 1승이었다. 그리고 한유진은 이혜준의 바람대로 이 꼭두새벽부터 망설이지 않고 이혜준이 이겼다는 승전보를 울려주었다.

 

 

 

-…침묵이 불안하네요. 실수로 건 전화에 내가 너무 기뻐한 건가?

 

"아니에요. 그런 서운한 말 하지 마요."

 

-아니에요?"

 

"네, 아니에요."

 

 

 

 기쁨을 숨기지 않는 웃음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혜준의 귓가에 울렸다.

 

 이혜준은 한쪽 팔에 힘을 주고 상체를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앉았다. 커튼이 창을 가리고 있었지만 천 사이로 밝은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혜준은 한 번 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 사무관, 너 진짜로 성공한 거야.

 

 

 

-그럼 말해봐요. 2년 가까이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이혜준이 갑자기 전화했던 이유.

 

"…한유진 씨. 내가 그쪽 때문에 어떻게 지냈는지 알면 그렇게 속 좁은 소리 못할 거예요.

 

-왜요, 나처럼 목숨 걸고 당신을 구하기라도 했나?

 

"겨우 한번 구한 거 가지고 아직까지 생색을 낼 줄이야."

 

 

 

 난 일곱 번이나 전력을 다했다고, 따져들고 싶었지만 혜준은 꾹 참았다. 이건 꿈이 아니니 자칫 헷갈리는 말을 했다가는 꽤 길게 해명해야 할 테니까.

 

 

 

-이유, 듣고 싶어요.

 

"…통화하는데 특별한 이유 필요해요?"

 

-이혜준이니까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쉽지만 틀렸네요. 그냥 꼭 오늘 한유진 씨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어요. 그래서 전화했어요."

 

 

 

 혜준의 솔직한 대답에, 유진은 잠시 답이 없다가 낮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혜준이 오랫동안 궁금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서. 나도 빨리 정리하고 돌아가고 싶은데, 벌려놓은 일들이 너무 많아요. 서둘러서 빨리 처리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피해가 커져요. 근데 그건 이혜준이 원하지 않을 거니까.

 

"……"

 

-솔직히 자신도 없었어요. 언제까지 이혜준이 기다릴 수 있을지 확신도 없고.

 

"한유진 씨."

 

-그렇다고 똑같이 연락 한 번 없는 이혜준이 야속하기도 하고. 나도 끈질기게 참을 수 있다고 보여주고 싶기도…

 

"뉴욕은 날씨가 어때요?"

 

-…갑자기 그건 왜 물어요?

 

"여행을 가볼까 싶어서."

 

 

 

 사실, 날씨가 안 좋아도 갈 예정이에요.

 

 갑작스러운 여행 다짐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느라 잠깐 침묵하고 있던 유진이 곧 정적을 깨고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당장 인천발 뉴욕행 티켓을 알아보겠다며 애처럼 기뻐하는 것을 들으면서, 혜준은 머릿속으로 오늘 출근을 하자마자 당일 반차와 함께 그동안 미뤄뒀던 연차를 모아 이번 주에 남은 근무일을 모두 휴가 낼 것이라는 멋진 플랜을 세웠다. 이 두 가지가 오늘 할 일의 전부였고, 수정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도통 전화를 끊지 않으려는 유진에게 한나절 후에 보자고 다독인 후 머리를 감으면서도 이혜준 역시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이 샴푸 거품처럼 떠올랐다. 한유진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적어도 그를 현재에 존재하게 만든 가장 마지막 꿈에서 나눴던 대화는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혼자 질문에 꼬리를 물다가도 이제는 그냥 얼굴을 마주하고 물어보면 알 수 있다는 사실이 혜준의 입가에서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오게 만들었다.

 

 

 

 

 

-

 

 

 

 

 

 이혜준은 확정이라고 자부했던 근사한 계획을 약간 수정해야만 했다. 작은 일정 하나를 더 추가하는 방식으로.

 

 출근길에 그동안 유일한 아군이 되어줬던 진마리의 핸드폰을 울려 먼저 승전보를 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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